입력 : 2015.04.06 10:34 | 수정 : 2015.04.09 20:22
지난 4월2일 저녁 진로그룹의 고위 직을 역임했던 모 인사가 다급한 전화를 받는다. 북경에서의 전화다.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였다. 장 회장과 통화를 해보라는 전언이었다.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모씨는 “웬일이시냐”고 물었다. 이때 장 회장은 “힘들다. 괴롭다.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만취한 것 같아 내일 통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다음날 이상해서 전화했더니 장 회장은 이미 운명을 한 상태였다.

한때 재계의 황태자로 잘나가는 30대 재벌 총수로 군림했던 전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은 국적도 말소된 상태에서 조국이 아닌 중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3세. 어쩌면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조선일보DB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조선일보DB
필자는 지난 1990년 서울 서초동 진로 본사에서 장 전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전 직원들에게 집을 마련해 줘야 한다며 서울 신길동 공장 부지를 아파트로 개발, 싼 값에 직원들에게 분양했을 때다. 이때 장 회장은 “직원들이 회사를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너의 책임”이라면서 “무주택 직원들이 내 집을 가질 수 있으면 더 이상 행복이 어디 있겠냐”고 밝혔었다. 실제 진로그룹은 임직원들의 주택 유무를 파악해 무주택 직원들로 하여금 조합을 결성토록해 싼 값에 신길동과 월계동 주택을 공급했다.

그후 진로그룹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승승장구했다. 재계에서도 성공한 2세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진로의 최 전성기는 1996년이었다. 당시 연간 매출액이 3조원을 넘어섰고, 24개 계열사에 재계순위 19위에 랭크됐다. 소주하나로 유통과 건설 등을 아우르는 이른바 재벌의 반열에 정식으로 자리매김한 해였다.

그러나 진로의 성장은 그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무리한 몸 불리기를 한 ‘성장통’이 시작된 것이다. 1997년 4월 자금 압박을 받자 부도유예협약을 정부에 신청했다. 당시만해도 이 제도가 생소한 때였다. 정부는 서민의 애환이 담긴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의 부도를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국내 최초로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채권단 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국 그해 9월 부도를 맞고 말았다. 1985년 진로그룹 경영을 책임진 지 10년을 겨우 넘기고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 뒤에도 장 회장은 진로의 회생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사촌형(장익용), 이복형(장봉용·사망)과의 경영권 싸움에 힘겹게 승리하며 진로를 재벌의 반열에까지 올려놨으나 진로는 창업 73년만에 ‘장씨 가문’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장학엽 창업주는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조카인 장익용 회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당시 2세들이 나이가 어린 탓이었다. 장익용 회장이 진로를 이끌면서 점점 경영권을 강화하자 장진호 회장은 이복형인 장봉용 회장 등과 합심해 사촌형을 경영진에서 물러나게 했다. 사촌 형을 몰아낸 뒤 두 형제는 한동안 밀월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다 이복형인 장봉용 회장에게 ‘진로발효’를 떼어주고 모기업인 진로는 장진호 회장이 차지했다. 장진호 회장은 창업주의 후처 자식이다. 적자는 이복형인 장봉용 회장이다. 그러나 경영능력면에서 동생인 장진호 회장이 낫다고 판단한 주주들의 선택이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진로그룹 경영권 분쟁사다.
장익룡 (주)서광 회장(왼쪽), 장봉룡 진로발효 회장./조선일보DB
장익룡 (주)서광 회장(왼쪽), 장봉룡 진로발효 회장./조선일보DB
그 뒤 진로는 미국계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가 채권을 사들여 최대 단일 채권자가 됐다. 골드만삭스는 2003년 화의 절차가 진행 중이던 진로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이 해 5월 서울지법 파산부는 골드만삭스의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였다. 진로는 법정관리 상태에서 매각이 추진돼 2005년 4월 하이트맥주가 진로의 인수기업으로 결정됐다. 이 해 9월 진로는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경영을 정상화했다. 대한민국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는 현재도 같은 브랜드로 국민의 사랑을 받지만 창업주 가족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태다.

장 회장은 2003년 수천억원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고 풀려났다가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집행유예기간에 해외에 나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국적마저 상실한 채로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로 도피한 것은 그 나라가 주정의 원료인 ‘타피오카’의 주산지로 진로와는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나름 지인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사업을 펼칠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었다. 그곳에서 금융회사를 만들어 재기하려고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캄보디아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다 지난 3일 최후를 맞은 것이다.

장 회장의 갑작스러 비보를 접한 옛 진로 임원들은 한결같이 장 회장은 “홧병으로 죽었다”고 입을 모았다. 무리한 확장 등으로 자금력에 이상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IMF가 오기전이라 모든 기업들이 몸집 불리기에 나섰을 때였다는 것이다. 부채가 많았지만 기업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임원은 몇 년전 월간조선 인터뷰에 장 회장의 한이 서려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013년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장 전 회장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전두환-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진로그룹은 '정치적 희생양'이 돼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장 전 회장은 “1984년부터 임춘원 전 의원을 통해 ㈜진로 주식과 자금을 DJ에게 제공했다”며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속으로 DJ가 진로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1년 8개월 동안 일주일에 3일씩 검찰과 안기부 조사를 받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1984년부터 10여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500억~600억원 가량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는데 오히려 대통령이 되고 나서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었다. 장 전 회장의 정치자금을 DJ에게 건넨 임 전 의원은 12ㆍ13ㆍ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한때 ‘DJ 자금책’으로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다. 임 전 의원은 2011년 간 질환으로 사망했다.
임춘원 전 의원./조선일보DB
임춘원 전 의원./조선일보DB
한때 촉망받던 재벌 2세 총수에서 국적도 없이 쓸쓸히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무모한 ‘재벌놀음’이 빚은 결과인지 그와 그의 측근들의 주장처럼 정치적인 희생양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직 이르다.그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권과 재벌 후손들의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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