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16 11:09 | 수정 : 2015.01.25 14:35
모택동의 맏아들 모안영(毛岸英)은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러시아어 통역을 담담하다가 한반도 6·25전쟁 때 사망했다. 그사이 ‘모안영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북한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라고만 소설처럼 씌어져 있었고 어떻게 사망했나 하는 구체 사연은 언급되지 않았었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사람들의 회고록을 통해 그 구체적 사연이 밝혀졌다. 나인문(羅印文)이 집필한 지원군 제1부사령관 등화(鄧華) 장군의 전기, 그리고 다른 여러 장군들의 회고록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당시 지원군사령부는 평양부근 회창군(会昌郡) 대유동(大榆洞)에 위치해 있었다. 1950년 11월 24일 해질 무렵, 지원군사령부의 팽덕회, 등화, 홍학지(洪學智) 셋은 밖에 나와 산보를 하며 미군의 비행기가 그곳의 상공을 한 시간 남짓이 맴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셋은 이에 지원군사령부의 위치가 미군에게 폭로된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날 밤 9시경에 지원군사령부는 긴급회의를 열고 새로운 방공(防空) 대책의 명령을 내렸다. 1)공병에 명령하여 새로운 방공호를 만들 것, 2)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마치고 당직자 외에는 새벽 4시 전에 모두 새로 지정된 방공호로 자리를 옮길 것, 3)4시 후부터는 모든 거처지에서 연기를 뿜는 일이 없게 할 것 등이다.
모택동과 그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오른쪽)
모택동과 그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오른쪽)
그런데 모안영은 3시에 일어나 밥을 한 술 먹은 후 당직 임무도 없이 새 방공호로 피신하지 않은 채 책상에 엎드려 5시간이나 잤다. 9시가 넘어서야 깨어나 난로를 피우고 계란에 밥을 볶아먹었다. 전날 저녁 북한 인민군 차수 박일우(朴一禹)장군이 팽장군에게 계란 여남은 알을 보내왔다. 그때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 정도의 계란도 매우 귀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에 가져왔기 때문에 팽장군이 먹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양적(楊迪) 장군이 팽사령관의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연통에서 연기가 나오므로 황급히 들어가 보니 방 안에서는 3사람이 계란에 밥을 볶아먹고 있었다. 모안영과 당직참모 고서흔(高瑞欣), 그리고 팽장군사무실 주임 성보(成普)였다.
“당신네 어찌 감히 팽사령관에게 선물한 계란을 먹을 수 있나? 빨리 난로 불을 끄고 자리를 옮겨”라고 양적이 나무라니 성보가 하소하였다.
“우리가 어찌 감히 계란을 먹겠습니까? 러시아어 통역인 저 분이 볶은 겁니다.” 팽장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안영이 모택동의 아들임을 전혀 모르고 통역으로만 알았다.

조금 지나자 미군 전투기가 날아와 다짜고짜로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소이탄은 팽장군의 사무실을 바로 명중하였다. 팽장군의 사무실은 폭격의 화재에 주저앉았고 성보는 불붙는 몸으로 뛰쳐나와 재빨리 불에 타고 있는 솜옷과 솜바지를 벗고 땅에서 뒹굴어 불을 껐다. 고체휘발유로 만든 소이탄의 불은 물로 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보는 불이 붙자마자 창문으로 탈출한 것이다. 그러나 모안영과 고서흔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불을 끄고 보니 두 사람은 이미 타서 숯처럼 되었다. 다행히 소련제 손목시계를 통해 모안영의 시체를 구분해 낼 수 있었다. 북한에 간지 34일 만에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개별행동을 하다가 비참하게 사망한 셈이다. 11월 25일에 발생한 참사이다.

중국은 6·25전쟁에 1백만 군사를 투입하였으며 36만명이나 희생했다. 그러나 1965~70년 중조관계가 나쁠 때 북한은 지원군열사의 묘지를 파헤쳐 없애버렸다. 지금 판문점 북한 군사박물관에는 지원군에 관한 내용을 전부 삭제하고 6·25전쟁을 마치 북한 혼자 치른 것처럼 만들어 놓아 중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중국은 그때는 스탈린의 꼬임에 당했고 후에는 북한의 배신행위에 당한 셈이다. 평양에 세워져 있는 지원군 기념탑, ‘우의탑’을 허물어버릴 날도 멀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모안영은 모택동과 부인 양개혜(楊開慧)사이에서 생긴 맏아들이다. 1922년생이며 8살 나는 해에 양개혜가 투옥될 때 같이 옥살이를 하다가 모친이 처형된 후 보석되었다. 어릴 때 부모 없이 떠돌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1936년에 소련에 보내져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탱크병 중위의 계급으로 베를린 점령 전쟁에도 참가했다. 1946년 중국에 돌아온 후 토지개혁, 선전사업, 공장의 책임자 등의 경력이 있다.

모안영은 지원군사령부에서 이미 심상치 않은 존재였다. 일개 통역에 불과한 그가 군사에 관한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팽장군에게 선물한 계란을 제멋대로 먹은 일, 팽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일 등은 이미 자기를 팽장군과 같은 위치, 심지어 더 높은 위치로 보았던 것이며 동료들의 반감을 샀다.

중국인들은 모안영의 죽음에 관해 의론이 분분하다. 모택동이 솔선으로 아들을 전방으로 보낸 것은 고상한 풍격이고 모안영이 사망한 자체는 불행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중국의 대권이 세습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 지금 북한의 상황과 비추어 볼 때 김정일, 김정은 보다 몇 배 우수한 모안영이 중국의 대권을 세습 받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중국공산당은 1943년부터 ‘모택동 만세’를 불렀으며 모택동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만세’는 임금을 옹대하는 말이고 사실 모택동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모택동은 사망하기 직전 대권을 화국봉에게 넘겨주며 사안이 생기면 강청(모택동의 부인)에게 물어 하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지금 중국공산당의 많은 고위층간부의 자식들이 ‘세습’받아 역시 고위층간부로 되었다. 모안영이 살아 있었더라면 중국의 대권을 세습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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