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1.20 15:06 | 수정 : 2014.11.20 17:39
(10) 낙동강 전선

아군 1개 연대 vs 적 1개 사단

국군 1사단에는 3개의 연대가 있었다. 11연대와 12연대, 그리고 15연대였다. 11연대는 다부동 초입이 있는 356고지와 297고지에서 석우동까지 이어지는 7.5㎞, 12연대는 수암산과 유학산 및 674고지를 잇는 9.5㎞, 15연대는 328고지를 중심으로 하는 3㎞ 길이의 전선을 맡았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11연대, 12연대, 15연대가 늘어선 형국이었다.

개전 초기 서울을 먼저 점령함으로써 김일성으로부터 ‘서울 사단’이라는 명예를 얻었던 북한군 3사단은 우려했던 대로 왜관 북쪽에서 진격하다가 화력이 국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미 제1 기병사단 방어지역을 우회해 15연대 지역으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대구 북방을 향해 직접 치고 내려오던 북한군 2개 사단과 미군 방어지역을 우회한 북한군 3사단이 모두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을 향해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유학산 일대를 담당한 12연대 앞에는 북한군 15사단, 그 동쪽으로 서 있던 11연대 지역에는 북한군 13사단이 공격을 벌여왔다.

우리는 따라서 다부동 전투가 막 벌어지던 무렵에는 각 연대가 북한군 1개 사단 병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특히 북한군 3사단이 밀고 들어오는 15연대 방어지역에서는 험한 지형 때문에 격전이 불가피했고, 12연대는 유학산 북사면을 먼저 점령한 북한군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형국이었다.
1950년 11월 무렵, 대구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어느 신병의 어머니가 먼길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떠와 먹이는 모습.
1950년 11월 무렵, 대구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어느 신병의 어머니가 먼길 떠나는 아들에게 물을 떠와 먹이는 모습.
매일 사단 지휘소로 날아 들어오는 보고는 그 격전과 혈전의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8월 14일 이후의 모든 상황은 아주 절박할 정도로 돌아갔다. 15연대는 고지를 두고 적과 뺏고 빼앗기는 접전에 들어갔다. 15연대 방어지역은 돌산이 많아 흙을 깊이 파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 참호를 제대로 파지 못해 인명 피해가 많았다.

유학산의 12연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대구 북방으로 800m 이상의 능선이 4㎞ 길이로 펼쳐져 있는 유학산은 방어를 하는 쪽인 우리가 정상을 향할 때 문제가 심했다. 700m 지점에 이르러서는 높이 70~80m의 아주 가파른 바위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북사면의 완만한 경사를 올라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북한군은 우리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아군이 7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류탄을 던지면 더 이상 오를 수 없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가다 죽거나 사망하는 병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따라서 12연대는 야간 공격을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적의 반격이 거세 피해는 계속 증가했다.

담뱃갑에 적은 신병 이름

내가 있던 다부동 동명초등학교의 사단 지휘소에는 적의 고지를 공격하다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이 나날이 쌓였다. 매일 전황 브리핑에서 보고받는 사망자 숫자가 자꾸 늘어나더니 2~3일이 경과하면서는 하루 700여 명의 손실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충격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사단 사령부를 나와 연대 전방 지휘소 등을 둘러보러 길을 떠날 때는 일부러 시신이 쌓여 있는 곳에 눈길을 두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참담한 그 광경을 보면서 괜히 투지(鬪志)가 꺾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미 그곳 일대는 무더운 8월의 날씨로 인해 주검이 부패하면서 번지는 냄새로 가득 차고 말았다.

전쟁은 여러 가지의 책략과 전기(戰技)를 필요로 한다. 싸움의 얼개를 다루면서 전체 흐름을 조정하며 적에 앞서 유리한 지형과 시간을 선점하는 전략적 안목, 병력과 화력을 제때 동원해 공격과 방어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보내는 전술적 시야 등이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낙동강 전선 서쪽, 대구 북방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는 그런 여러 가지 요소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적을 맞아 끝까지 싸우려는 굵고 강하며 꺾이지 않는 투지였다. 적도 사력(死力)을 다해 전선을 허물고자 덤벼들었고, 우리 또한 그에 맞서 젖 먹던 힘까지 자아내 적을 막아야 했다. 당시의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겠다는 강인한 투지였다.

병력 보충은 후방의 육군본부, 전시 행정 채비를 갖춘 정부의 노력으로 비교적 원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다급한 전시의 상황이라서 새로 모병한 장병들에게 충분한 훈련을 시킬 수가 없었던 점이 문제였다. 이들은 각 연대의 임시 훈련장에서 한두 시간 소총 작동법 등을 배운 뒤 전선으로 갔다.

각 고지에서 대원을 이끌고 있던 소대장들은 이렇게 올라온 신병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유학산 전선에서는 주로 밤을 틈탄 공격이 이뤄지고 있어 소대장은 신병이 올라오면 손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춘 뒤 “내가 소대장”이라고 소개한 뒤 공격을 이끌었다. 소대장은 또 신병들의 이름을 화랑 담뱃갑 쪽지에 적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나중에 전사자를 확인할 때 이름이나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 때 국군에게 배급된 화랑담배. 당시 우리 국군의 고난이 상징처럼 어려있는 담배다.
6.25 전쟁 때 국군에게 배급된 화랑담배. 당시 우리 국군의 고난이 상징처럼 어려있는 담배다.
돌아오지 않는 병사들

15연대의 상황은 아주 처절했다. 참호를 깊이 팔 수 없었던 까닭에 아군은 적의 공격에 자주 몸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15연대 장병들은 쓰러진 동료들의 시신 뒤에 숨어서 적과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신병들은 한번 올라간 뒤 내려오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열에 여덟아홉은 그렇게 산에 올라가 싸우다가 세상을 등졌다. 전사자 확인도 쉽지 않았다. 그들의 이름을 적었던 소대장 또한 전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설령 소대장이 살았더라도 신병들의 이름을 적었던 화랑 담뱃갑은 땀과 피에 젖어 적어 놓은 이름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희생당한 무명용사는 그런 이유로 해서 아주 많았다.

11연대의 싸움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곳 정면을 공격하던 북한군 13사단은 다부동 일대를 향해 다가서던 북한군 중에 병력이 가장 많아 전투력이 강했다. 역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과정에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피가 마르는 듯한 느낌에 빠졌다.

쉴 새 없이 전선을 들여다보면서 급한 상황이 생기면 일선을 지휘하는 연대 지휘소로 달려갔다. 현황파악을 위해 그 밑의 대대급 부대도 방문했다. 일선에서 마주치는 전쟁터의 피해는 참담했지만, 나는 전황을 파악한 뒤 가혹할 정도로 단호히 고지탈환 명령을 내렸다.

우리가 위기에 마주치면 잘 싸우는 민족이라는 점은 그때 알았다. 휘하의 장병들은 군말 없이 내 명령을 받고 전선으로 향했다. 지휘관들은 묵묵히 싸움터로 향했고, 겁에 질려 전선에 당도한 신병들도 명령을 내리면 어김없이 고지를 향해 달렸다.

일보(日報)라는 게 있다. 매일의 작전 상황을 육군본부에 보고하는 문서였다. 다부동 전투 중에 우리 1사단은 감찰을 받은 적이 있다. 작전 상황을 보고하는 일보를 육군본부에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 감찰팀이 사단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직접 현장에 보냈다. 15연대가 공방을 벌이고 있던 지역이었다.
다급한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전투에 나선 학도병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다급한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학생의 신분으로 전투에 나선 학도병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그들은 15연대의 방어지역인 270고지에 다녀왔다. 일보를 올리지 않은 일은 문책 사유에 해당했다. 그러나 육군본부 감찰팀은 고지를 다녀온 뒤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현지의 전황이 아주 처참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시체 냄새 때문에 현장을 제대로 살필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북한군은 ‘제파(諸波)식’ 공격을 벌이고 있었다. 물결처럼 끊임없이 다가서는 방식이었다. 소련군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선보였던 전술이었다. 돌파구를 설정해 그곳에 여러 차례의 공격 진영을 짜놓고는 계속 투입하는 방식이다. 소련의 작전계획을 따랐고, 그들의 전법까지 그대로 보고 배웠던 북한군은 최후의 돌파를 위해 인명의 손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전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5연대 전면에서는 계속 공방이 벌어졌고, 유학산은 아군이 쉽게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11연대 또한 북한군 13사단과 치열한 공방을 전개하면서 희생이 나날이 커졌다. 8월 16일에는 유엔군의 대대적인 공습이 벌어졌다.

미 8군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8월 16일 오전 11시 58분경에 대규모 공습이 있을 예정이니 전 병력으로 하여금 진지에 그대로 남아 있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미 공군이 정확히 어느 곳을 폭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지시에 따라 당일의 그 시간에 맞춰 전 병력에게 진지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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