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1.07 11:04
이 글은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만은 내가 많은 은인들 도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책을 썼다”고 했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찍었는데,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부씩을 더 찍었다. 그의 동의를 받아 책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66년 12월 1일 검사에 임명되어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몇 개월 안 돼 묘령의 여성으로부터 연애편지 한 통을 받았다. 50년이 넘은 일이어서 편지 내용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으나 몇 구절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오빠, 며칠 전 광화문 지하도를 손잡고 걸으면서, 이북에서 피난와서 외롭게 살았는데 당신을 만나고부터 인생이 즐거워졌다고 하시던 말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아내와 결혼한 이후 다른 여자와 만난 적도 없고, 더욱이 그 무렵 광화문 지하도를 걸었던 적도 없었다. 즉각 ‘누가 내 이름을 팔아 가짜 남 검사 행세를 했구나’하고 직감했다.

그때만 해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검사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결혼 적령기에 든 여성들은 판·검사를 신랑감으로 선호했기 때문에 가짜 판·검사 행세를 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이들은 판·검사가 임명될 때 신문에 발표되는 인사명단을 보고 판·검사 행세를 했다. 이들이 여성들을 꾀어 돈을 뜯어내고 결혼하자고 유혹하여 몸을 더럽히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피해가 커지기 전에 이 여성을 만나 진실을 밝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 여성 주소지를 관할하는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빨리 그 여자 집에 가서 그 여자에게 남 검사가 보자고 한다고 말하고 검사실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그 여성이 집에 있었는지 두 시간도 안 되어 경찰관이 그 여성을 데리고 검사실에 들어왔다.

그 여자는 자기가 만난 남 검사를 찾느라고 검사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책상 위에 놓인 ‘검사 남문우’라는 명패와 내 얼굴을 보더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나는 그 여자를 내 앞 의자에 앉혔다.

“내가 남문우 검사인데 나를 만난 사실이 있습니까?”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사칭한 사람으로부터 아가씨를 보호해 주려는 것이니 피해 당한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대답을 못하고 울기만 했다. “혹시 그 자에게 돈도 빼앗기고 몸도 준 것 아니냐”고 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사기꾼을 잡아야 했다.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 사기꾼을 빨리 잡아야 하니 협조해달라”며 “앞으로 그 자에게 연락이 오면 눈치채지 않게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약속한 뒤 그를 만나기 전에 꼭 검사실로 전화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그 이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짜 남 검사는 잡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에 또다른 여성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그 여자는 “어제도 만났는데 왜 딴소리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이 여자도 ‘가짜 남 검사’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 여자를 만나 범인을 잡는데 협조하라고 부탁할 생각으로 “아, 내가 잠깐 딴 생각하느라고 몰라봐 미안하다. 지금은 나갈 시간이 없지만 꼭 할 이야기가 있으니 검사실로 직접 찾아와달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여자도 검사실에 오지 않았다. 그 이후 전화도 걸지 않았다. ‘가짜 검사’가 횡행하던 시절, 안타까운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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