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28 05:39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서민가정 젊은이들 인터뷰]

임대아파트서 홀어머니와 살며 아르바이트로 청춘 보내
공부에도 소홀히 안 했지만 노력만으론 소용없단 생각이…
"가진 것 없지만 따님을…"에 예비장모 "드라마서나 나올 얘기"
"양문형 냉장고 필요한가" 묻자 여친 "왜 그리 궁상맞게 사냐" 결혼 말 나온지 8개월만에 깨져

젊은이 한 쌍 결혼하는 데 남자는 7545만원, 여자는 5226만원 든다. 이후 아이 하나 낳아 대학까지 졸업시키려면 3억896만원이 또 들어간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작년 이후 내놓은 통계이다. 본지는 지난 2012년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연중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의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작은 결혼식'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취재팀이 조사 회사 메트릭스와 함께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젊은이들을 인터뷰했다. 한 가정을 일구겠다는 꿈으로 들떠야 할 젊은이들 목소리에서 '박탈감'이 진하게 묻어났다.


[대기업 계약직 32세 미혼男]

가난한 집 아들이 약속했다. "가진 건 없지만 따님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여자 친구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야. 자네가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내 딸 보낼 생각은 없어."

2011년 가을 A시 한정식집에서 대기업 계약직 박성준(가명·32)씨가 여자 친구 어머니와 나눈 대화다. 1년 반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을 약속한 직후였다. 여자 친구 어머니가 "내 딸 빼고 자네 혼자 내려오라"고 하더니 "자넨 아닐세" 했다. 박씨는 "펀치를 맞은 것 같았다"고 했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온몸에 힘이 세게 들어갔다.

냉장고

연애는 서울에서 했다. 여자 친구 직업은 학원 강사. 부모가 준 돈과 본인 저축을 합쳐 서울 강남에 2억9000만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해둔 상태였다.

반면 박씨는 홀어머니와 1억3000만원짜리 임대 아파트에 살았다. 가능하면 여자 친구가 사는 전셋집에 들어가 살고, 정 신혼집을 새로 구하자고 하면 어머니와 살던 집을 쪼개서 5000만원쯤 보태려 했다. 여자 친구 부모 눈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결혼 비용.
여자 친구는 처음에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고 싶어했다. 둘이서 혼수와 드레스를 알아봤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눈높이가 달랐다.

"예를 들어 '냉장고는 꼭 양문형으로 사야 한다'는 식이었어요. 저는 그게 왜 꼭 필요한지 이해가 안 갔어요. 여자 친구가 막판에 '나는 여력이 되는 사람인데 왜 너 때문에 궁상맞게 살아야 하느냐'고 했어요." 결혼 말 나온 지 8개월 만에 깨졌다.

아르바이트 청춘

박씨는 스무 살 이후 집에 손 벌리지 않았다. 군대 갔을 때 말고는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없다. 편의점·택배·노래방 카운터·공사장 막일…. 교통비와 밥값 빼고 나머지는 거의 다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빚을 갚았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이혼하며 남긴 빚이었다고 한다.

대학 시절 박씨는 아르바이트 중간에 빈 강의실에서 쪽잠을 잤다. 밤일과 새벽 일이 촘촘하게 이어져 집에 가서 눕는 대신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빙 돌며 존 적도 있다. 와중에도 부지런히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대학 동기가 도서관 대출 기록을 검색하다 "오빠가 책 제일 많이 빌려 갔던데?" 한 적도 있다. "노력했지만 갈수록 소용없단 생각이 강해진다"고 했다.

감정선

"잘사는 친구가 있어요. 아직 취업도 못했는데 결혼식 비용만 1억원을 썼어요. 부모님이 대주고, 집도 사줬어요. 예전엔 그런 친구가 소수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친구 주위엔 비슷한 사람이 수두룩해요. 그들 눈엔 제가 특이해 보이겠지요. 시간이 흐른다고 제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그는 "고등학교 땐 다 같이 어울렸지만 이젠 친구들끼리도 '감정선(感情線)'이 달라졌다"고 했다. 삶의 조건에 따라 같은 일을 겪어도 다르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여자 동창이 "시댁에서 예단으로 3000만원을 가져오라신다"고 걱정한 적이 있다. 박씨는 그게 옳은지 그른지 따지기에 앞서 숨이 턱 막혔다. 잘사는 친구들은 달랐다. "어차피 절반 정도는 신부한테 뭐 사라고 돌려주니까 괜찮아" 했다. 큰일이 아니라는 투였다.

아빠 되기 겁난다

박씨의 연봉은 3000만원이다. 대기업에서 일하지만 정확히 따지면 인력 파견 업체 직원이지 대기업과는 무관하다. 최근 인력 파견 업체가 대기업과 맺은 계약서를 우연히 봤다. 대기업이 그의 월급과 별도로 매달 70만원씩 인력 파견 업체에 입금하고 있었다.

처음엔 울컥했다. '나를 정규직으로 쓰느니 이 돈을 더 내겠다는 거구나.' 이어 마음을 삭였다. '이만한 자리도 없잖아.' 그리고 불안해졌다. '이런 식으로 2년마다 옮겨다니다 나이를 먹으면?' 그는 작은 대학 인문계열을 만학으로 졸업했다.

지금 그에겐 새 여자 친구(23)가 있다. 둘이 가끔 결혼 얘기를 한다. 지난번과는 달라야겠다는 생각에 "우리 둘 다 어려우니 뭐든 꼭 필요한 것만 싼 걸로 하자"고 틈날 때마다 못박고 있다. 차마 말로는 못한 얘기도 있다.

"여자 친구가 아기 얘기를 많이 해요. 낳고 싶대요. 겁이 나요. 감당할 수 있을까요? 남들은 불임(不妊)이면 불행하다고 해요. 저는 '불임이면 감사해야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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