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21 16:07

사약 1잔 먹고 끄떡 없어 3잔 먹고 죽은 건강체

우암은 젊어서부터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유지해 온데다 구기자와 국화차를 마시며 유유자적하였기에 늙어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중년 이후에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암은 효종 연간에 처방, 침구, 단방(향약요법) 등을 수집하여 정리한 <삼방촬요(三方撮要)>라는 한의서를 저술했을 정도로 한의학을 다년간 연구하였던 경력이 있기에 스스로 어지간한 처방을 낼 수 있을 정도였고, 주변에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이런 저런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어 그야말로 ‘백약(百藥)이 무효’인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지만 가까스로 약방문을 얻어 극적으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암을 살린 미수(眉叟) 대감의 약방문(藥方文)

우암은 아들을 불러 병세를 상세히 적어 주면서 “지금 곧 미수 대감께 가서 이것을 보여 드리고 약방문을 얻어 오너라”고 일렀습니다. 미수는 ‘허목(許穆, 1595-1682)’이라는 분인데, 늦게 벼슬길에 올라 우의정에까지 오른 남인(南人)의 거두였죠. 당시는 노론(老論)과 남인 간의 당쟁이 심할 때였는데, 우암과 미수는 북벌론이나 효종 임금 승하시 상례 문제 등에서 정면으로 대립하여 서로 원수같이 지내던 최대의 정적 사이였습니다.

우암의 아들은 크게 놀라며 “왜 하필이면 미수 대감에게 약방문을 청하십니까? 만일 약방문에 독약이라도 써 넣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우암은 아들을 꾸짖으며 미수 선생에게 다녀올 것을 명하니 아들은 갈 수 밖에 없었죠. 미수 선생은 부탁을 받고는 묵묵히 증세를 읽어 보고 약방문을 써 주었습니다. 우암의 아들이 돌아와서 약방문을 보니 대부분 ‘비상(砒霜)’, ‘부자(附子)’, 백두옹(白頭翁 : 할미꽃 뿌리)을 비롯한 극약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이 처방은 아버님을 독살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절대로 이 약방문으로 약을 드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암이 이르기를 “미수는 의술을 공부한 선비로서 병중의 정적을 독살할 졸장부가 아니다”라고 아들을 꾸짖고, 빨리 그 약방문대로 약을 달여 오라고 하였죠.

우암은 달여 온 약을 조금도 의심 없이 마셨는데, 며칠 동안 혼절해 있다가 나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완전히 다 낫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그대로 약을 지을 수가 없어서 비상을 절반만 넣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죠. 이처럼 질병에 따라 극약을 써야만 나을 수 있는 경우가 드물게 있습니다. 우암은 당시 매일 아이의 오줌을 받아 마시는 건강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몸속에 응어리가 쌓여 있어 그 응어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비상을 비롯한 극약을 써야만 했던 것이죠.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오른쪽).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오른쪽).
아이 오줌을 받아 마셔도 괜찮을까?

우암은 요료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모를 정도로 손발이 따뜻했다고 합니다. 우암은 83세 때 “장희빈이 낳은 왕자의 원자 책봉이 너무 빠르니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숙종의 미움을 사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료법 탓인지 사약 한 잔을 마셨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어 결국 석 잔이나 마시고서야 비로소 숨을 거두었다고 하지요.

요료법은 동양에서 아주 옛날부터 활용되어 왔는데, 청나라의 서태후와 일본의 왕실 고관들도 요료법을 건강장수의 비법으로 썼다고 합니다. 우암은 아이의 오줌을 마셨지만, 요료법은 자기의 오줌을 주로 공복에 마신다고 합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의 오줌을 받아서 다른 것을 섞지 않은 채로 마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줌이란 노폐물로 나온 것이니만큼 요료법은 권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오줌이 한약으로 쓰였다?

옛날에는 오줌이 한약으로 쓰였습니다. 당나라의 명의 손사막(孫思邈, 581-682)은 <천금익방(千金翼方)>에서 소변을 ‘외과 방면 최고의 약’이라 했습니다. 명나라의 이시진(李時珍, 1368~1644)도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소변을 이용해 고칠 수 있는 질병을 40여 종이나 들었습니다. 청나라 말기의 명의 당용천(唐容川)은 소변을 마시고 몸이 회복되어 기운이 펄펄 나는 모양이 흡사 용이 돌아온 것 같다하여 ‘회룡탕(回龍湯)’이라 불렀죠. 또한 온갖 병을 고쳐 원래의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놓는다고 ‘환원탕(還元湯)’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의가에서는 소변과 사람의 젖, 그리고 사람의 태반의 세 가지를 일러 ‘목숨을 구하는 지극히 귀한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체내에서 나온 것을 받아 마시면 이것이 몸속을 돌아 생리적으로 활성화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서, 약재로서의 소변을 ‘윤회주(輪廻酒)’라고도 하였죠. 정신이 되돌아오게 할 정도로 좋은 약이라 하여 ‘환혼주(環魂酒)’라고도 합니다. 또 몸이 허약해지면서 가래에 피가 섞여 나오거나 코피를 쏟기도 하고 출산 후에 어혈로 인한 통증, 각종 타박상 등에 신선한 소변을 받아 따뜻하게 한두 잔을 마시거나, 탕약 속에 넣어 마셨습니다. 소변에는 어혈을 흩어버리고 피를 멎게 하는 효능도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른 좋은 약들이 있으므로 굳이 소변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오줌을 한약으로 썼나?

한약으로 오줌을 쓸 때는 아무 오줌이나 쓴 게 아니고 반드시 어린 사내 아이 오줌만 썼습니다. 그것을 ‘동변(童便)’이라고 하는데, 옛날부터 화기(火氣)를 내리는 데 쓰였죠.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었을 때 동변에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을 개어 먹였다고 합니다. 또 동변은 한약재 수치(修治)에도 쓰였는데, 한약재를 동변에 담가 두었다가 쓰는 것을 동변침(童便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동변은 여러 가지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궁중의 내의원(內醫院)에서는 오줌을 받는 아이들이 필요했지요. 동변군(童便軍)이라고 하는데, 궐내의 사역원(司譯院: 외국어 교육원), 봉상시(奉常寺: 종묘의 제사 및 시호를 정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 관상감(觀象監: 천문, 기상 관측을 담당하는 관청) 등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아이들을 차출해서 오줌을 받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지엄했던 왕이나 왕비도 아이들의 오줌을 먹었던 셈이죠.

오줌으로 만들어진 약

오줌으로 만들어진 약으로는 인중백과 추석이 있습니다. 인중백(人中白)은 오줌을 옹기 질그릇에 받아 두면 바닥과 벽에 허옇게 막이 형성되는데요, 이것이 두터워지면 긁어서 불에 달군 다음 가루를 낸 것이죠. 오줌의 침전물이므로 화기를 내리고 어혈을 풀어주며 입과 혀가 헐고 아픈 것을 막아줍니다. 추석(秋石)은 동변을 고아서 정제(精製)한 결정물(結晶物)입니다. 이것은 오줌과 달리 성질이 따뜻한데요, 몸이 쇠약해졌거나 혹은 오줌을 저절로 흘리거나 오줌이 뜨물처럼 뿌옇게 나오거나 혹은 정액이 저절로 흘러나오거나 정력이 약화되었을 때 썼습니다. 청나라의 옹정황제가 추석을 복용하였고, 영조임금도 추석환을 드셨다는 기록이 있지요. 20년 전까지는 소변에서 유로키나아제를 추출하여 동맥경화를 치료하는 혈전용해제로 활용했습니다.

피부에도 활용되었던 오줌

동의보감에 보면 오줌이 피부를 매끄럽게 해 준다고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에스키모인이나 만주 지방에 살던 읍루(挹婁 : 말갈족) 사람들은 집안의 한가운데 오줌통을 놓아두고서 버리지 않고 모은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방한복이 별로 없어 워낙 거센 추위에 견디기 위해 온몸에 돼지기름을 두텁게 발랐는데, 비누가 없었기에 돼지기름을 씻어내는데 오줌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물론 오줌을 바르는 바람에 피부가 고왔다고 하지요. 옛날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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