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15 07:50 | 수정 : 2014.10.15 10:18

정주영과 구자경(上)

정주영 회장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각계에 걸쳐 매우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LG그룹 구자경 회장과는 대단히 각별한 사이였다. 구 회장이 정 회장보다 열살 연하이고, 창업세대인 정 회장과 2세대인 구 회장, 그리고 너무나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성격으로 보아 조화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주위에서 보기에도 흐뭇한 두터운 우정관계를 수십년 유지하였다.

정 회장은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잔정이 많고, 재치와 화술, 임기응변력이 뛰어났다. 이에 비하여 구 회장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며 수줍음을 타고, 감정표현이나 말이 너무 솔직하고 직선적이다 못해 퉁명스럽게 보이는 성격이었다. 구 회장이 ‘사람은 모름지기 누가 안보고 혼자 있을 때도 항상 처신을 바로 해야 한다’는 뜻의 ‘신독’(愼獨 – 君子必愼其獨也의 줄임)이라 쓴 휘호를 사무실에 걸어 놓고 이의 덕목을 실천할 것을 늘 휘하에 강조했던 것은 그의 이런 성격의 일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우정이 더욱 각별했던 것은 이러한 성격의 차이점을 서로 있는 그대로 편안한 개성과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아껴주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경련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도 대단히 적극적이다 못해 때로는 공격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대정부 관계에 있어서도 주요 현안에서 입장 차이가 나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의 정 회장을 구 회장은 자주 못마땅해 하고 불평하면서도 내면으로는 항상 뒷받침하여 정 회장의 힘이 되어 주었다. 이런 관계로 1987년 정회장은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 속에서도 전경련 회장직을 극구 고사하는 구 회장에게 승계시키고 물러나게 된다.
구자경 LG 명예회장
구자경 LG 명예회장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매해 신년 초가 되면 전경련은 회장단 연두 기자회견을 갖는다. 전경련의 사업 방향 뿐만 아니라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현안문제에 대해 견해를 언급하기도 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리가 된다. 또한 전경련의 회장단으로 대표되는 국내 각 재벌그룹들의 새해 구상을 밝히기도 하는 자리다.

1982년 전경련 연두 기자회견장. 이날 따라 정회장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고 얼굴이 환하게 상기되어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반면, 구자경 회장은 어쩐 일인지 심기가 대단히 불편한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급적 정 회장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아마 이 날 정회장이 처음으로 간단하게 언급한 현대그룹의 전자공업분야 진출계획이 탐탁치 않은 때문인 것 같았다. 이럴 때 눈치 빠른 기자들이 이것을 놓칠 리 만무하다. 이윽고 그들은 짓궂게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을 붙이기 시작했다. 한 기자가 구 회장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모든 사업을 대단히 공격적으로 추진하시는 현대그룹의 정 회장이 전자공업을 시작하신다고 발표했는데 구 회장께서는 혹시 겁이 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심기를 참고 있었는데 대단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었다.
“겁은 누가 겁을 내요? 전자공업은 아무나 합니까? 내 얘기는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전자공업을 한답시고 건설에서 번 것 다 까먹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상대로 구 회장이 얼굴을 붉히며 있는 대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정 회장은 불쾌한 표정은 고사하고 친근한 아우의 투정을 대하듯 만면에 웃음을 띄며 구 회장을 달랬다. “내 참, 구 회장은 항상 저런단 말이야. 걱정 말아요. 나는 전자공업을 해도 국내시장이 목표가 아니고 해외시장이란 말이요, 해외시장. 우리는 시작부터 IBM 하고 얘기가 잘 되어 전자부품을 전량 납품하기로 했단 말이요. 구 회장한테 하나도 피해를 안 줄 테니까 염려 말아요.”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그 때 일을 되돌아 볼 때 이 두 사람의 가벼운 설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주영 회장
정주영 회장
또 다른 일화들을 더 소개한다.
1984년 2월,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무역역조 시정을 요구하며 대단한 통상 압력을 가해왔다. 급한 나머지 정부는 우선 미국에 대한 성의표시라도 해야 되는 입장이라 대통령이 특별히 파견하는 사절단이라는 격을 부여한 대통령 대미 구매사절단을 구성했다. 정주영 전경련 회장을 민간단장으로 내세워 전경련 회장단을 주축으로 국내 30대 재벌총수들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게 되었다. 물론 구자경 회장도 참가했다. 미국 행정부 뿐 아니라 백악관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사절단을 예우했다. 백악관, 상무성 방문 등 워싱턴 DC의 일정을 마치고 다음 행선지인 뉴욕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다 예약된 기편이 있었으나 백악관에서 극구 특별기 편을 제공하겠다고 나서서 고사 끝에 그 비행기로 이동하게 되었다.

30여명의 대표단 일행이 타면 자리가 꽉 차는 중형 비행기였다. 이에 더하여 백악관에서는 제인 셰이클포드라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쯤 되는 여자 의전담당관을 뉴욕까지 동승시켜 사절단 일행을 수행토록 하는 아주 예외적인 배려까지 하였다. 그녀는 모든 단원이 다 탑승하는 것을 돌보고 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기내에 들어 왔다. 갑자기 나타난 홍일점, 그것도 빼어난 금발미녀, 외국 여인의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 세련된 화장, 짙은 향수로 기내가 갑자기 환해졌다. 나이 지긋한 한국재벌 총수 남자들로만 꼭 차 있던 기내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이 때 기내 중앙 통로 양 쪽으로 둘씩 앉게 되어 있는 좌석에는 공교롭게도 빈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구 회장의 옆자리였다. 순간에 상황을 알아차린 수줍음 많은 구 회장이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여자 의전관은 좌석을 한 번 둘러 본 후 당연히 유일하게 남은 빈자리인 구회장 옆자리로 다가갔다. 구회장의 얼굴은 순간 홍당무가 되었다.

주위 사람들 얼굴 표정에는 약간 짓궂은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했다. 그 의전관은 구 회장 앞에서 세련된 예를 갖추어 구 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영어로 “이 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 때 뒷자리의 정회장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이거 구회장, 이번 여행에서 제일 수지맞게 되었는걸.”
구 회장의 얼굴은 더 새빨갛게 달아 올랐다. 다급한 나머지 구 회장은 한 손은 들어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세워 대고 다른 한 손을 황급히 내어 저으며 영어를 못하니까 딴 데 가서 앉으라는 의사표시를 필사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얼마나 딱한 일인가? 딴 데는 빈자리가 없었다. 여자 의전관은 대단히 황당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정쩡 구 회장 옆자리에 앉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정 회장은 구회장을 골려줄 좋은 기회를 잡은 듯 했다.

그런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식 연회장 등에서 정 회장과 나란히 앉은 경우 식탁 위의 소금이나 후추가루 등이 구 회장으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경우 자상한 정 회장이 손수 그것을 구 회장에게 건네주면 구 회장은 시치미 딱 떼고 “정 회장, 심부름 잘해서 용돈이라도 많이 주어야겠군” 하는 식의 농담에서부터 정 회장에게 때로는 그 특유의 면박 가까운 농담을 서슴지 않았다.
“귀여워 했더니 이 버릇 좀 봐, 허허허!”
정 회장의 응수였다.

정 회장은 구 회장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기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은 구 회장에게 쏠리고 이를 의식하는 구 회장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정 회장은 수줍어 어쩔 줄 모르는 구 회장을 더 조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서울로 다 돌아가도 구 회장은 아무래도 미국에 남아야 되겠는걸. 우리 서울에 돌아가서도 구 회장을 위해서 이 소문은 내지 말기로 합시다.”
백악관 여 의전관은 그래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극복하려고 애교 넘친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섞어 가며 구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이 계속해서 긴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 회장의 표정에도 어느 정도 긴장이 가셔지는 듯 했고 뉴욕 공항에 도착할 쯤 되어서는 구 회장도 간간히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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