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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바바 마윈 회장 "나는 金庸 무협소설 속 高手 풍청양"

입력 : 2014.10.11 07:50

中 최고 갑부를 키워낸 '武林의 세계'

비즈니스도 소설처럼
마윈 집무실은 '도화도'
회의실은 '광명정'으로 불러

직원들도 소설 속 이름 써
강호의 무림 고수들처럼
개개인 능력 발휘하라는 뜻

무림式 경영 철학
힘·두뇌로만 싸우는 무협지
IT 시대엔 '창의성 기폭제'

무협의 본질은 '의리'
"고객에게 돈 벌게 해주면
당신은 더 번다" 철학 세워

"무협소설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탐미한 것이 나에게 사유의 날개를 달아줬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의 마윈(馬雲·50)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마윈은 최근 뉴욕 증시 상장에 성공해 중국 부자(富者) 제1순위(재산 약 26조원)에 올랐다. 월급 1만5000원짜리 영어 강사였던 이 사내를 중국 최고의 갑부로 키운 것은 무협소설의 힘이었다.

마윈은 홍콩 무협소설 작가 진융(金庸·90)의 팬이다. 알리바바 직원들은 진융 무협소설의 인물 이름을 딴 별호를 사용한다. 마윈의 별호는 진융 소설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화산파 고수 '풍청양(風淸揚)'이다. 마윈 집무실은 '사조영웅전'의 주요 배경인 '도화도(桃花島)', 회의실은 '의천도룡기'에서 명교(明敎)의 집결지로 나오는 '광명정(光明頂)'이라고 불린다. 마윈은 알리바바를 '무림(武林)'으로 상정한 셈. 우리나라 학부모들에겐 악서(惡書)로 여겨지는 무협소설이 마윈에겐 '창의성 기폭제'로 작용했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지난 7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월드 2014’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최근 뉴욕증시 상장 성공으로 중국 최대 부호가 된 마윈은 진융의 무협소설을 탐독하며 경영 아이디어를 얻었다.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 지난 7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소프트뱅크 월드 2014’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최근 뉴욕증시 상장 성공으로 중국 최대 부호가 된 마윈은 진융의 무협소설을 탐독하며 경영 아이디어를 얻었다. / 블룸버그
오직 힘과 두뇌로 싸우는 세계

전형적인 무협소설에선 몰락한 명문가의 후손이 세상을 떠돌다 기연(奇緣)을 만나 절세무공을 전수받고, 그 무공으로 악의 무리를 제압한다.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를 쓴 전형준 서울대 중문과 교수는 무협소설이 '성장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전 교수는 "성장담과 모험담은 독자에게 지적·정서적으로 자극을 줄 수 있다"면서 "중국에서는 무협소설이 '자본주의 문화의 쓰레기'라고 해서 금지됐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문화대혁명 시기를 제외하고는 엄청나게 사랑받았다. 중국인들의 오락, 상상, 언어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무협소설사'를 쓴 이진원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는 무협소설을 '지식의 보고(寶庫)'로 봤다. 이 교수는 "중국에서 무협소설을 공통의 화두로 삼아 비즈니스를 성사시키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알리바바 직원들이 무협소설 캐릭터를 별호로 삼는 것은 기업의 중국성(性)을 홍보하고자 하는 전략이자 각각 장기(長技)를 지닌 무림 고수들처럼 직원들에게 개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겠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고 했다.

'군림천하' 등을 쓴 무협소설가 용대운씨는 "무협소설은 인간의 힘과 두뇌만으로 싸우는 원초적 경쟁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산업사회보다 요즘 같은 IT 시대에 오히려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알리바바의 마윈이 롤모델로 삼은 '풍청양'은 갑자기 등장해 주인공에게 절세무공인 독고구검(獨孤九劍)을 전수한 후 홀연히 사라지는 청포노인(靑袍老人). 중국 무협소설 평론가 량서우중(梁守中)은 저서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에서 풍청양 가르침의 핵심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무초가 유초를 이긴다(無招勝有招)'. 즉 진정한 고수는 무예의 초식(招式·태권도의 '품새'에 해당하는 기술적 동작)과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라 그를 무화시킨다는 뜻이다. 둘째,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초식은 무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음모와 계략, 함정에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경고와 풍자를 내포한다.

의리의 세계, '俠'

중국 작가 장샤오헝(長笑恒)은 '마윈처럼 생각하라'에서 마윈의 경영 철학을 "고객이 돈을 벌게 해주면 당신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로 분석했다. 이는 '무협(武俠)'의 본질인 '협(俠)', 즉 '의리'의 원리가 작동한 것.

한국 무협소설의 선구자 김광주(1910 ~1973)의 아들인 소설가 김훈은 6일 전화 통화에서 "'협'이라는 건 로망이다. 남의 재난, 위기, 억울함에 과감히 개입하는 것이 협이다. '무협'은 물리적인 기술인 '무'가 '협'에 의해 작동되었을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으로 완성된다"고 말했다. 무협소설가 용대운씨에 따르면 중국에서 '협'이란 곧 '대의(大義)'다. 그는 "땅덩어리 큰 중국에서는 집을 떠나면 모두 타인이다. 따라서 '협'은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몸과 시간을 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마윈의 '무림식 경영'을 무협소설 전반이 아니라 진융 작품의 특성에만 주목해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전형준 서울대 교수는 "진융 작품은 한족(漢族)뿐 아니라 이민족까지를 아우르는 신(新)중화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어 경영 원리에 부합한다. 그러나 진융 작품이 무협소설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구룽(古龍)처럼 데카당스한 실존주의를 보여준다거나, 왕두루(王度盧)처럼 삶의 비극적 내면을 탐구하는 작가도 있다"고 했다.

중국선 교과서, 한국선 惡書

홍콩 만화가 리즈칭(李志淸)이 그린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
홍콩 만화가 리즈칭(李志淸)이 그린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 / 조선일보DB
1986년 고려원에서 처음 출간된 진융의 '영웅문'(3부 18권)은 100만부 넘게 팔린 밀리언셀러였다. 이후 2003년 김영사에서 정식 판권 계약해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3부 24권으로 다시 출간됐다. 이처럼 공전(空前)의 베스트셀러였음에도 국내에서 진융 소설은 학생들이 '몰래 숨어 보는 책'이었다. 진융 작품을 비롯한 무협지가 중·고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중국과는 판이한 상황이다. 전형준 서울대 교수는 "국내 기업인 중 무협소설 마니아들이 있지만 마윈과는 달리 대체로 그런 취향을 드러내길 꺼려한다. 우리나라에선 무협소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무협은 일종의 '판타지'다. 중국보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공자가 멀리 하라고 했던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일종으로 봐서 꺼렸던 것 같다"고 했다.

대본소를 통해 보급됐다는 것도 무협지의 부정적 인식에 영향을 끼쳤다. 무협소설 전문 출판사인 청어람 권태완 편집부장은 "수준 높은 번역서들도 들어왔지만 한때는 저급한 성인물도 유행했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신무협'이 등장하면서 국내 무협의 수준이 높아졌지만 그를 모르는 기성세대들에게는 여전히 '무협소설=악서'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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