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10 09:59
조선의 대유학자이자 노론의 영수로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선비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데, 83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것도 늙어서 여러 번 귀양을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사약(賜藥)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기에,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90세 정도는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과연 우암 선생의 장수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후손들이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조선일보DB
후손들이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조선일보DB
젊은 제자들이 따라가기 힘들었던 우암의 빠른 발걸음

우암은 젊은 시절에 빨리 걷기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24세에 김장생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여 율곡의 학통을 물려받았는데, 일 년 뒤에 김장생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김집 선생에게 배워 학문을 대성했습니다. 그런데 벗이었던 송준길 선생의 권유에 따라 집을 회덕(懷德)의 송촌(宋村), 즉 은진 송씨 집성촌으로 옮겨가서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이 공부했습니다. 회덕에서 김집 선생이 사는 연산(連山)까지는 50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송시열 선생은 매일 책과 도시락을 싸다니며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100리 길을 걸어 다녔기에 우암 선생의 다리는 무척이나 튼튼해졌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렇게 빠르게 걸어 다닌 바람에 넓은 개울이나 도랑을 거의 평지같이 걸어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늙어서 산수를 유람하러 다닐 때는 함께 따라나선 문하생들이 미처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잘 걸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삼시마다 한 되 밥을 먹고 하루에 백리 길도 못 가는 사람은 학문도 능히 성취해 내지 못하는 위인이다”하는 말로 재촉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빨리 걷는 습관이 몸에 밴 것이 우암을 평생 건강의 길로 이끌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즘 걷기 운동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약간 빨리 걷는 것이 좋습니다. 땀이 잘 나고 혈액순환도 더욱 활발해지므로 효과가 커지요.

평생 부지런하게 살았던 우암

우암은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았습니다. 68세에 함경북도 덕원으로 귀양을 갔을 때의 일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지요. 마음이 아픈 데다 북방의 겨울이라 무척 추웠기에 건강이 나빴지만 하루 종일 방안에 앉아 지칠 줄 모르고 책을 읽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모든 시름을 잊으려는 듯 저술에 몰두하여 3년간의 고심 끝에 72세의 나이로 <주자대전차의>라는 책을 완성했습니다. 치질에다 가래기침 등 악화된 건강 상태와 싸우며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거의 쉴 틈도 없이 매달렸다고 합니다. 나태함을 싫어하고 부지런하게 지내는 습성이 그대로 이어졌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다

우암은 벼슬살이를 늦게 시작했고, 관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29세에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됐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이후에는 산 속의 조용한 곳에서 지냈습니다. 43세 때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왕의 부름을 받아 벼슬을 제수 받게 되는데, 이후로 무려 28번이나 관직에 취임과 사퇴를 반복했습니다. 52세 때 이조판서가 됐고 북벌 계획에도 깊숙이 관여하지만 다음 해에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현종이 즉위한 53세 때 왕의 신임을 얻어 좌참찬을 지냈으나 다음 해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습니다. 62세에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고, 65세에 다시 우의정, 좌의정을 잠깐 지냈습니다. 만약 우암이 골치 아픈 벼슬살이를 계속 했더라면 건강상태가 나빠져 장수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균관대 박물관장 이준식 교수가 2014년 9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공개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자첩(大字帖)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씨는 '富貴易得 名節難保'(부귀이득 명절난보,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는 뜻) 8자로 한 글자가 대략 89x90cm, 전체 길이가 7m에 달하는 국내 서예사상 유명인사의 가장 큰 글씨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로서 최초로 공개되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글씨는 우암이 모함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스승의 변론에 앞장선 제자 농계 이수언에게 써준 것으로 이 글귀는 '주자대전(朱子大全)' 54권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성균관대 박물관장 이준식 교수가 2014년 9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개관 50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공개한 우암 송시열 선생의 대자첩(大字帖)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씨는 '富貴易得 名節難保'(부귀이득 명절난보, 부귀는 얻기 쉬우나 명예와 절개는 지키기 어렵다는 뜻) 8자로 한 글자가 대략 89x90cm, 전체 길이가 7m에 달하는 국내 서예사상 유명인사의 가장 큰 글씨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유물로서 최초로 공개되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글씨는 우암이 모함을 받았을 때 목숨을 걸고 스승의 변론에 앞장선 제자 농계 이수언에게 써준 것으로 이 글귀는 '주자대전(朱子大全)' 54권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공기 맑은 곳에서 재야 생활을 즐긴 우암

우암은 절간에서 독서하기를 좋아했고 산천 유람을 즐겼습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공림사(空林寺), 속리산에 있는 고산사(高山寺)와 서대사(西臺寺), 진산에 있는 청림사(靑林寺)에 들어가 세속의 번다함을 피해 책을 읽곤 했습니다. 그리고 금강산이나 선유동을 찾아 심신을 달랬다고 합니다. 젊어서 충북 황간의 냉천리에 초당을 지어 이주했는데요, 산 높고 계곡 물 맑은 곳으로 사색과 독서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아울러 건강 장수에 좋은 여건이기도 했죠.

60세에는 충북 괴산의 낙양산 아래 화양동(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계곡의 빼어난 경치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죠. 지극히 아름다운 천석(泉石)의 경치가 있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책 보기가 아주 좋다고 했습니다. 화양동 계곡의 운영담 위에 다섯 칸 크기의 살림집을 마련하고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 떨어진 금사담 위에 세 칸 크기의 정자를 지었는데, 그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암서재(巖棲齋)입니다. 이 정자에서 독서와 사색을 했으며 때로는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우암은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이죠. 77세에도 10일간에 걸쳐 금강산 유람을 했다고 하니 건강 상태가 꽤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소한 식생활

우암은 아주 가난하였기에 산나물로 이루어진 몇 가지 반찬이 고작이었고, 그나마 때로는 끼니를 굶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평소 소식을 하는 데다 밤늦게 귀가하면 저녁도 들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밤늦게 밥을 먹으면 몸에 해롭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위장병으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이토록 조심하게 된 것이죠. 역시 사람은 약간의 병이 있어야 조심하게 되어 건강을 유지하고 중병을 예방하여 장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범생 같은 일상생활

우암은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멀리했습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피우지 않았고, 젊은 시절부터 술과 여자를 멀리 해서 늙도록 건강을 잘 유지했던 것이죠. 80세 가까이 되어서도 머리카락에 윤기가 있어 제자들의 탄복을 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신건강을 유지했고,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편안함을 즐기는 자세로 지냈습니다. 조선 최고의 대유학자로서 수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우암이기에 마음 건강의 달인이었죠. 그랬기에 수차례에 걸친 귀양살이도 잘 견뎌내었던 겁니다. 우암은 인간의 내장과 마음이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보아 정신 건강에도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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