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07 10:10
이 글은 남문우(80) 전 검사가 쓴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자식들만은 내가 많은 은인들 도움으로 인생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할 것 같아 책을 썼다”고 했다. 비매품으로 1000부를 찍었는데,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은 인생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지인들의 권유에 최근 두 차례에 걸쳐 각각 500부씩을 더 찍었다. 그의 동의를 받아 책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나는 대학 3학년 1학기 때인 1957년 6월 5일 학도병 현역 입영 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군번은 0005288. 당시까지만 해도 대학생들은 현역군인 입대를 연기 받아 왔으나 학생들을 군에 입대시켜 1년6개월의 단기 복무를 마치고 제대시키는 학도병 제도가 생겨 내가 제1기로 징집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법대 동급생 중에도 40여명이 함께 징집됐다.

서울에서 고학으로 공부하는 동생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동생들이 잘 견뎌 내리라 믿고 군대에 갔다. 훈련소에 들어가 보니 그 동안 옷으로 치장되어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 본색이 그대로 드러나듯, 그동안 학교에서 고귀하게만 보이던 법대 동기생들의 본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려운 환경일수록 서로 힘을 합쳐 협동심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거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기 개인 이익을 위하여 남을 짓밟는 이기주의의 극치만을 보여줘 나를 슬프게 하였다. 나는 그때 ‘앞으로 절대로 법과대학을 나온 사람을 사위로 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처가가 있는 고향집에 내려가지 못하고 논산훈련소에 가서 편지와 옷 보따리만을 고향집에 보내 군대에 입대한 사실을 알렸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 받으면서 제일 기다려지는 것이 주말마다 허용되는 가족들의 면회였다. 훈련병들은 주말에 있을 가족들의 면회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참았다.

하지만 훈련기간 내내 나에게는 가족들의 면회가 없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아내는 오고 싶어도 어른들의 승낙이 없어서, 동생들은 어려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으니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논산훈련소에서 몇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그 해 10월쯤 부대에 배속되었다. 강원도 양주에 있는 육군보병 12사단 37연대 산하 중대였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명으로 “학도병들은 행정병으로 배속 할 수 없고, 말단 소총 소대원으로 배치하라”는 지시공문이 따라 붙어 학도병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원 최전방부대 소총수로 배속되었다.

나는 부대에 배속 받고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내가 소속된 중대원들은 중대장과 육사 출신 소대장 한 두 명을 빼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단 한명만 있어 중대 본부 서무계 일을 보고 있었다. 그 외 사병들은 초등학교 중퇴자나 무학자가 대부분이었으며, 초등학교 졸업자도 몇 사람 안 되었다.

중대원 대부분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노동을 하다가 군대에 온 사람들이었다. 집이 서울인 사람도 없었다. 선임하사나 하사관들을 제외한 사병들은 군인다운 기백이나 용감성은 없었고 빛 바랜 누더기 옷에 몇 달 굶주린 거지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또 사병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 건축자재로 만든 뒤 군 트럭으로 실어내 파는 소위 후생사업이었다.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아침 저녁으로 나누어주는 밥은 항상 부족했다. 육사 출신 소대장들이 밥그릇을 들고 사단사령부까지 뛰어가서 항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때 육사 출신 소대장들의 정의감과 용감성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앞으로 육사 출신들이 모두 군 장교로 자리를 차지하는 날 우리 국군도 제자리를 잡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부대에 배속된 그 다음날 큰 사고를 쳤다. 배속 첫 날 내가 소속된 부대가 정해져 내부반원들과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계급이 병장인 분대장이 “어느 대학 다니다 왔느냐”고 물었다. 서울대 법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에 왔다고 했더니 분대장 이하 전 대원이 부러움 반, 질투심 반의 눈초리로 나를 원숭이 보듯 하여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고 마침 비가 와서 벌채작업을 못 나가고 분대원 전원이 내무반에서 칼빈총 수입(소제)을 할 때였다. 나는 칼빈총을 분해하여 깨끗이 닦은 후 다시 조립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다쳐 피를 흘렸다. 무척 아팠으나 꾹 참았다. 그런데 분대장이란 사람이 “자식, 대학 나오면 뭐하나, 총기 수입도 못하는 놈이”라면서 모욕적인 말을 하였다.

나는 위로는커녕 욕설을 하면서 모욕을 주는 데 화가 났다. “아무리 상관이지만 개인적인 실수를 가지고 인격적인 모욕을 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 분대장은 “야 이놈 봐라, 기록카드에 잉크도 안 마른 새까만 졸병놈이 상사에게 반항하는 거야? 이 새끼 이리 나와”하면서 총대를 거꾸로 잡고 나를 때리려 달려들었다. 순간 가만히 있다가는 총개머리로 맞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칼빈총 개머리를 거꾸로 잡고 일어서 소리쳤다. “내가 아무리 졸병이지만 개인적인 일로 모욕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덤벼봐라, 너 죽고 나 죽자!”

우리 둘은 서로 총개머리 판을 거꾸로 잡고 결투하듯 한참을 싸웠다. 그 때 마침 우리 막사 옆을 지나가던 선임하사가 달려 들어와 우리 둘을 떼 놓지 않았더라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맞아 죽거나 큰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선임하사가 둘을 떼 놓고 싸운 이유를 물어 내가 대충 경위를 설명했다. 선임하사는 중대장에게 보고하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선임하사는 나를 데리고 중대장실로 갔다. 중대장님은 나에게 온화한 말로 말했다. “남 일병, 여기는 대학과는 다른 군대다. 그러니 사회에서와 같이 생각하면 안 되고, 상관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남 일병의 행동은 군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군을 잘 몰라 한 것으로 보고 이번 한 번은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겠다. 또 분대장이 같은 일로 남 일병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니 앞으로 잘 적응해서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도록 하게.” 중대장님은 나를 내보내고 나서 분대장도 불러 비슷한 주의를 줬다.

그 날 인자하고 훌륭한 중대장을 만나지 못했으면 나는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후 그 중대장 성함이 김삼용(金三龍)대위이고, 고려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제대한 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 찾아뵙고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고 싶어 고려대학교와 육군본부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 분의 주소를 찾지 못했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 사건 이후 악질인 분대장의 지시와 간섭을 어떻게 받으며 살아갈까 걱정이 됐다. 고심 끝에 분대장 지시를 받지 않으려면 분대장이 시키기 전에 내가 솔선하여 먼저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부터 즉시 실행에 옮겼다. 매일 당번을 자청해 아침밥을 타다가 분대원들에게 나누어주고 밥을 다 먹은 후에는 깨끗이 설거지도 했다. 그리고 집합 명령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나갔다.

그렇게 하다 보니 몸은 고되었으나 분대장 지시를 안 받아도 돼 마음은 편했다. 한달가량 똑같은 일을 반복했을 즈음 그 악질 분대장이 나에게 오더니 말을 걸었다. “남 선생, 내가 남 선생을 잘못 보아 실수를 했으니 용서하시오. 앞으로 유감 갖지 말고 잘 지냅시다.” 그리고는 악수를 청했다. 나는 순간 그동안 그를 그토록 미워했던 것이 부끄럽고 창피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 큽니다.”

그 후 그는 나에게 친절히 대해줬다. 내가 청소를 하면 빗자루를 빼앗아 자신이 스스로 쓸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다 게으름을 피우는 졸병들이 있으면 이렇게 야단쳤다. “야! 남 선생 반만 닮아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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