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07 10:36

피할 수 없었던 라이벌 정주영-박태준(하)

상편에서 계속

한편 정주영 회장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관계 또한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정 회장은 박 대통령의 파트너가 되어 서로 교호하며 혼신을 다 바쳐 국가 산업발전을 위한 대역사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세론의 반대와 비웃음을 무릅쓰고 조선사업, 자동차 사업을 극적으로 성공시켜 국가 산업구조 현대화와 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고, 석유파동의 여파로 국가 재정이 파국에 직면했을 때 중동 진출이라는 파격적 출사표를 내 성공시킴으로써 나라를 구한 고맙고 대견한 경제발전의 민간 반려자였다.

정 회장 역시 박 대통령에 대한 경외심은 단순한 존경 차원을 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박 대통령 타계 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어느 계제에서든 박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늘 순간적으로 자신의 자세와 목소리를 엄숙하게 가다듬곤 했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박 대통령은 포항종합제철 독점체제 유지를 강력히 어필하는 박태준 회장의 손을 들어 주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기왕에 설립했던 일반 제철소인 인천제철을 키워 나가며 오랜 세월 절치부심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이렇듯 일관 제철소 건립에 대한 정 회장의 끈질긴 집념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박태준 회장이 포항제철 경영에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또 다른 상황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대기업들로 구성된 민간경제계의 대표격인 전경련을 둘러싼 두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거대 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포항제철은 물론 한전, 한국도로공사 등은 이들의 규모나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전경련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전경련 회원으로 가입은 하고 있었지만 그 대표나 임원들은 전경련 회의에 참석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다. 그것은 전경련 사업이 정부의 경제 정책, 특히 경제운용과 개발계획, 조세, 금리 등 통화 정책, 각종 규제에 대한 민간 경제계의 의견을 내고 사안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 주된 것인데, 인사나 운영에 대해 정부의 영향 하에 있는 이들 공기업의 입장이 민간기업 대표들로 구성된 여타 전경련 회원들과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1979년 10·26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 전개되었던 상황이다. 준비나 기반이 없는 가운데 정권을 잡은 신 군부가 권력 기반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무리수를 불사하고 힘과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길들이기에 나섰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대상에서 경제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의 눈에 거슬렸던 대기업 총수의 기업이 정부 강압에 의해 이런저런 구실로 주인이 바뀌는 일들도 발생했다. 국내의 주요 경제 단체에도 그들의 손이 미쳤다.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들이 그들의 의지에 의해 교체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주영 회장이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경련은 유일하게 이러한 압력에 저항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정주영 회장은 신군부가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워 밀어붙이고 있었던 대기업 업종별 통폐합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여러 공식 석상에서 이의 부당함을 피력하고 다녔다. 그 당시 서슬이 퍼랬던 신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섰던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그러나 신군부도 이에 지지 않았다. 무리수를 써서라도 정주영 회장을 교체하여 자기들의 위세를 세상에 확인, 과시 하고자 했다.
정주영 회장(왼쪽)과 박태준 회장
정주영 회장(왼쪽)과 박태준 회장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이 새로운 전경련 회장으로 의중에 두었던 인물이 박태준 회장이었다. 거기에는 박 회장이 군 인맥이라는 그들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근본적으로 정부의 직접적 영향력 하에 있는 공기업 대표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표면상 대외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일단 그들에게 협조적인 전단계 인물을 우선 내세울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신군부의 의도는 그들의 위압적인 위세에도 불구하고 막상 회장을 새로 선출하는 총회에서 그들이 경제부처를 통해 사전 제시한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정 회장 연임을 만장일치로 가결해 버리는 ‘반란’에 의해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후 박태준 회장은 1987년부터 전경련 부회장의 한사람으로서 전경련 회장단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열심히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다. 또한 전경련 사무국의 각 사업 부서를 담당하는 임원들이 사업 계획을 보고할 때 의견을 개진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한 사업부서 책임자로 업무 보고 차 매번 회장단 회의에 배석했던 필자의 눈에는 민간기업 총수들과 박 회장 사이에는 한국의 철강 산업을 일으킨 그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와는 별개로 사무국이 보고하는 주요 사안에 대한 입장이나 분위기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과 동화의 한계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기간 동안에도 신군부 정권이 기회를 보아 박태준 회장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의지가 계속되었던 것은 여러 정황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정주영 회장과 민간기업 재벌 총수들의 입장은 분명했다.

“전경련은 민간 경제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순수한 자율 단체인 점이 존재 이유다. 따라서 회장직을 비롯하여 지도부나 사무국 인사에 대하여 정부의 의지와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그 회장도 민간기업의 입장을 자유롭게 대변할 수 있는 위치의 인사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1987년에 끝나는 임기를 마지막으로 정 회장 자신이 더 이상 연임하지 않기로 한 의지를 굳히고 극구 고사하는 엘지그룹의 구자경 회장을 밀어부치다시피 후임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것이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서 종지부를 맺게 된다.

정 회장은 총회를 한 시간 가량 앞두고 그가 소집한 마지막 사무국 임원회의 때 전경련 회장 후임에 대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의 대화, 그리고 청와대 경제 수석과 해당 경제부처 장관으로부터 받은 언질에 대해 언급했다. 전경련 회장직을 민간 경제계를 대표할 수 있는 인사가 맡게 하기 위한 정 회장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은 그 시점까지 지속되었던 신군부의 의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된다.

박태준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그 자신이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신군부의 의지에 의한 것인지는 본인 스스로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 회장 못지않게 강한 개성과 추진력을 가진 그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어떠한 형태로든 한국 민간 경제계에 자신의 방식대로 한번 뜻을 펼쳐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관제철소 독점 문제에 더하여 전경련 회장직과 관련한 미묘한 관계는 오랜 기간 한국 경제사의 두 거물간의 갈등과 라이벌 관계를 겉으로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심화시키게 만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갈등 관계의 단초가 되었던, 정주영 회장의 생전 숙원 사업이었던 현대제철의 고로방식 일관제철소는 그의 후계자 정몽구 회장에 의하여 정 회장이 타계한 5년 후인 2006년 착공, 2010년 1월에 제1 고로, 11월에 제2 고로, 2013년 9월에 제 3 고로에 화입식을 함으로써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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