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24 17:18 | 수정 : 2014.09.24 17:39
북한이 지난 22일 김정은의 조모 김정숙 사망 65주년을 맞으며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가운데, 김정숙의 사망원인이 임신 중 김일성에게 배를 걷어차였기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A씨는 전직 정부 고위관료 출신으로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 계열의 친척이 되는 인물이다. 익명을 요구한 A씨는 1949년 남한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김일성의 고향인 만경대 칠골에 살면서 김일성이 만경대에 드나드는 것을 여러 번 봤다고 한다.

그는 “김일성이 1940년대 말에 여서기와 바람이 났는데 부인 김정숙의 눈을 피해 고향 만경대로 내려왔다”며 “고향에 여서기와 부관 1명만 데려와서는 하룻밤 묵고 갔다”고 했다. 당시 김일성을 따라갔던 여서기가 훗날 그의 후처가 된 김성애이고 부관이 현재 91세의 북한군 원수 리을설이다.

김정숙은 김일성의 정실부인이고 김정일과 김경희를 낳았지만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구박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김정숙을 항일의 여성영웅으로 추켜세우고 초상화에 미녀로 그려 넣었지만 실상은 왜소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김정숙의 원본사진을 포샵처리해서 다시 전시하도록 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김일성의 가족 사진. 왼쪽은 아들 김정일, 오른쪽은 부인 김정숙. 김정숙은 194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젊은 시절 김일성의 가족 사진. 왼쪽은 아들 김정일, 오른쪽은 부인 김정숙. 김정숙은 194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탈북자는 김정숙은 백두산의 여장군이 아니라 밥짓고 빨래하던 백두산 부엌데기였다고 했다. 산에서 쫓기는 신세였던 김일성은 자신에게 헌신하는 김정숙과 결혼을 했지만 못생긴 외모와 우직스러운 성격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8·15해방 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먹고살 만하게 되자 부인 김정숙 몰래 여서기를 데리고 만경대에 갔는데 그의 할머니가 손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을 알고 “못난 놈”이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김정숙이 눈치를 채고 남편의 뒤를 쫓아 만경대까지 와서 여서기와 함께 있는 김일성을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는데, 김일성의 할머니 김보현이 나와서 김정숙의 편을 들며 김일성을 욕했다고 한다. 화가 치민 김일성이 밖으로 뛰쳐나가며 임신한 김정숙의 배를 걷어차고는 여비서를 데리고 평양으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배를 걷어차인 김정숙은 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실려갔지만 유산을 하고 끝내 본인도 사망했다고 한다. 김정숙은 김정일이 8살 되던 해인 1949년 9월 22일 병원에서 아이를 낳다가 32살 나이로 숨진 것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김일성이 자기 때문에 일찍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과 김경희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각별하게 신경을 써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머니를 잃은 김정일이 성격이 괴팍해져 깡패처럼 행동해도 다 받아주었다고 한다. 김정숙 사망 이후 성격이 비뚤어진 김정일은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유치원에서 싸움질을 하거나 선생들을 놀려대면서 말썽을 피웠는데 이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이 선생들을 집에 초대해 깍듯이 모셨다는 일화도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 종합대학 시절에도 신발을 꺾어 신고 교내를 돌아다니거나 학장방에 들어갈 때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버릇없기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 민청간부 출신의 한 탈북인사는 종합대학 시절 김정일 별명이 ‘난쟁이 깡패’였다며, 김일성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 김정일은 김성애를 극도로 싫어했다.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 김정일은 김성애를 극도로 싫어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이 김정일에게 준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장하면서 사연을 알게 된 김정일은 어머니 사망 이후 계모로 들어온 김성애를 평생 원수처럼 대했고 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애는 1952년 김일성의 공식 후처가 되었지만 전쟁기간이라 공식 결혼식을 올리지 않다가 1963년 뒤늦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어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기 전까지 김성애 우상화 작업이 추진되면서 김정숙 지우기가 진행됐다고 한다. 김성애는 김정숙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김정숙이 언급된 문서들을 없애버리고 김정숙과 관련한 글을 쓴 집필자들을 모두 지방으로 내려보냈다. 동시에 김성애 스스로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시작했는데, 김성애 포스터가 전국의 거리에 나붙고 책자도 발간됐다.

김성애는 김일성의 모친인 ‘강반석 어머니 따라 배우기 운동’을 전개해 김일성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김성애가 위원장으로 있던 여맹조직은 노동당에 버금가는 파워조직으로 성장했고 1970년대 초까지 북한에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김성애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의 총애가 깊었고 두 아들 김평일과 김영일을 낳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성애 세력은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1974년 이후 몰락하기 시작했다. 여맹조직은 격하되고 김성애는 공식활동이 금지되었다. 김성애가 낳은 자녀들인 김평일과 김영일, 김경진은 ‘곁가지’로 낙인찍혀 현재까지도 해외를 떠돌고 있다. 김성애는 1994년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부부의 방북 때 잠깐 모습을 비춘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 석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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