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11 16:26
(8)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끝)

밴 플리트의 말년은 평온했다. 전쟁터를 휘돌다가 돌아온 그를 고향 플로리다는 따듯하게 맞았다. 목장을 비롯해 일부 사업을 확장하려는 의지도 보이면서 밴 플리트는 요란하지는 않으나 활기에 찬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애정만큼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창설을 주도해 끊임없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펼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여러 기회를 잡아 한국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의 자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의 4.19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下野)한 뒤 하와이에 망명객 신분으로 거주했다. 이 대통령은 1965년 7월 서거했고, 밴 플리트는 그 소식을 들은 뒤 하와이에 가서 이 대통령의 운구 행렬에 참가했다.

그는 전쟁으로 고아가 된 한 한국 소녀를 깊이 후원했다. 그는 한국 전선을 이끌면서도 거의 입양한 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소녀를 도왔다. 밴 플리트의 후원으로 곱게 자라던 소녀는 특히 학습 능력이 아주 뛰어나 경기여고에 진학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 전선에서 이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 밴 플리트는 지속적으로 그 소녀를 지원했다. 그러나 병을 앓았던 소녀는 밴 플리트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먼저 떴다. 나는 밴 플리트 사령관이 한국 전선을 이끌던 무렵 그가 소녀를 후원한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나이 많은 밴 플리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귀국했던 후원자의 가슴에 다른 상처 하나를 더 남기고 말았다.
젊은 시절의 밴 플리트(왼쪽).
젊은 시절의 밴 플리트(왼쪽).
그는 한국의 전쟁고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밴 플리트는 미 8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고아 수용시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시간을 쪼개 그곳에 들러 적지 않은 물품을 보태고 돌아오는 적도 많았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알리는 데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나와 친분이 깊었음에도 그는 한국의 소녀를 후원한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을 매우 꺼렸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도 친분이 깊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 5·16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 또한 밴 플리트가 어떤 심정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한국을 돕는지 매우 잘 알았다. 밴 플리트는 여러 활동을 펼치면서 한국을 돕는 데 계속 열정을 보였고, 이는 5·16으로 들어선 박정희 전 대통령 정부 인사들에게도 잘 알려졌다.

96세에 면허 다시 취득

밴 플리트는 은퇴 후 플로리다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미국 정부의 요청이 있을 때는 동아시아 군사 문제에 관한 자문에 나섰고, 미군의 전투준비 태세 점검을 위한 자문에도 기꺼이 나섰다. 특히 그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아시아 국가들을 미국이 왜 더 지원해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역설했다고 한다.

그는 천성(天性)이 군인이었던 듯하다. 고향의 도로를 100마일 이상의 속도로 주행한 그의 운전 실력은 노년에도 계속 화제였다고 한다. 그의 외손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밴 플리트가 나이 96세 때 운전면허 유효기간이 끝나 면허장을 다시 찾은 얘기가 나온다.
1953년 현역에서 은퇴한 밴 플리트(가운데)가 부인 헬렌 여사(오른쪽)와 고향 플로리다에 도착할 때의 모습.
1953년 현역에서 은퇴한 밴 플리트(가운데)가 부인 헬렌 여사(오른쪽)와 고향 플로리다에 도착할 때의 모습.
면허관은 96세의 은퇴한 대장 출신을 알아볼 리 만무했다. 면허관은 우선 그의 시력을 테스트했고, 이어 면허 갱신을 위해 지팡이를 짚고 나온 그의 연령(年齡)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내 시력은 문제가 없다”면서 시력 테스트를 완벽히 통과했고, 면허관이 지팡이를 문제삼자 지팡이를 차 뒷좌석으로 집어 던지면서 “이곳에 걸어올 때 필요해서 짚었던 것이고, 차를 몰 때는 당연히 필요가 없다”고 호언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밴 플리트는 계속 차를 몰았다고 한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밴 플리트는 워싱턴에 볼 일이 생겼을 경우 고향 플로리다를 떠나 워싱턴까지 왕복하는 길에 차를 직접 몰고 나섰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활력이다. 젊었을 적 미식축구를 통해 단련한 체력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왕성함을 유지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 점이 아깝다. 곧은 성정과 왕성한 활력으로 밴 플리트가 한국군 전력 증강의 뒤를 더 받쳐줬더라면 한국군이 빨리 실력을 키우고, 나아가 한 치의 땅이라도 공산군의 수중으로부터 더 빼앗아 올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그의 은퇴를 기정사실화한 상태였고, 그를 되돌릴 힘은 대한민국과 그에게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한국을 정말 사랑한 장군이었다. 그는 여러 곳에 사무실과 별장 등을 두고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운명한 곳은 플로리다 그의 목장이었다. 그 목장의 집무실 이름을 밴 플리트는 ‘한국의 방’이라고 지었다. 아울러 그의 회고록을 집필한 폴 브레임에 따르면 밴 플리트는 한국을 “나의 고향,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라고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리스도 그의 주둔지였으나, 말년의 밴 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사랑을 아낌없이 펼쳐 보였던 듯하다. 특히 한국의 산업화에 속도가 붙었던 1970년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강의 기적”이라며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1985년 이후에는 다리를 절기 시작해 움직임이 불편했다. 이는 그 전 해에 세상을 뜬 아내 헬렌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그는 그 무렵부터 활동의 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소망 ‘88 서울 올림픽’ 참석

그럼에도 그는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되자 서울행을 강력하게 희망했다고 한다. 회고록에 따르면 밴 플리트의 주치의는 “이 상태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며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서울 방문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짰던 밴 플리트는 아주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행의 꿈을 접으면서 밴 플리트가 남긴 말도 명언이다. “군인으로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느냐”였다.
1954년 고향 플로리다에서 지역 유지로 활동할 때의 밴 플리트 모습.
1954년 고향 플로리다에서 지역 유지로 활동할 때의 밴 플리트 모습.
나는 이번에 그를 꽤 많이 추억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한국 전선에 홀연히 나타난 미군 장성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력 증강이 발 빠르게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보는 시선이 그렇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던 무렵, 한국과 한 가닥 인연의 줄도 없이 나타나 다른 어느 누구보다 한국인의 단점과 장점을 알아보고 그를 채우면서 북돋으려 했던 사람이 밴 플리트였다.

그는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성정을 표현할 때 오렌지나 샌드위치를 많이 준비해 와 나와 나눠 먹었던 점을 자주 거론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지닌 것을 마음이 맞는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나눠주려 했던 사람이다.

그를 소개하는 이 글의 작은 제목이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다. 그는 늘 부드럽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그는 아이스크림 또한 남과 나눠 먹는 것을 즐겼다. 동숭동 미 8군 사령부 등 여러 곳에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발견하면 주위의 사람들과 나눠 먹기를 즐겼다. 그래서 우선 그의 면모를 떠올리다가 ‘아이스크림 장군’이라는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00세 생일을 맞이하던 날 고향 플로리다는 그를 위해 따뜻한 기념식을 열었다. 그 기념식에서 밴 플리트를 모시던 옛 부하 몇 명이 다가와 그에게 “장군께서는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이십니다”라는 작은 헌사(獻詞)를 바쳤다고 한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그는 군인 중의 군인이요, 보병 중의 보병이었다. 적을 향해,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가서는 군인 중의 군인, 보병 중의 보병이었다. 그 기념식이 끝난 뒤 밴 플리트는 역시 그답게 기념식장의 많은 이를 그의 목장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밴 플리트는 그 사람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대접했다고 한다.

나는 요즘에도 양식(洋食)을 먹을 때면 가능한 한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단 음식 많이 먹지 말라는 주치의의 충고를 떠올리면서도 말이다. 그는 내게 뭘 가르쳤던 것일까.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나는 그를 줄곧 떠올린다. 그는 내게, 적어도 당시의 대한민국 많은 이에게 결코 잊힐 수 없는 위대한 군인이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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