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05 05:30

만능 엔터테이너 재벌 총수(下)

재벌 총수 엔터테이너 정회장의 역할은 노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간 겪었던 자신의 체험담이나 비화 같은 것들을 격의 없이, 참으로 재미있게 구성해서 들려주곤 했다. 이 중에는 ‘성인용’ 얘기도 포함된다.

1979년 여름 정주영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한국 경제 사절단 일행이 약 일주일 간의 나이지리아 방문 일정을 마치고 출국을 위하여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친 그들의 마음은 단순히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일종의 해방과 안도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약 일주일간의 라고스 체재는 거의 견디기 어려운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물론 제일 고급 호텔에 묵었다. 하지만 무지무지하게 더운 날씬데도 호텔 냉방장치가 제대로 가동이 안되었다. 냉장고도 작동이 안되어 시원한 음료 한잔 마실 수가 없었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더는 길은 틈날 때마다 옥외 수영장에 나가 목만 내놓고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었다. 치안이 불안해 공식일정 외엔 한발도 호텔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정주영 회장의 19금 농담 '돌쇠와 아씨'
이런 악몽 같은 상황은 호텔 체크아웃 때 절정에 달했다. 정전이 되어 엘리베이터가 올스톱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공항 시간에 맞추어야 했기 때문에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전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호텔직원들은 제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지만 20 여명의 짐을 한꺼번에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리기는 역부족이었다. 현지 지사 직원들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정회장을 비롯한 대표단 일부를 제외하곤 땀범벅이 되어 직접 짐을 들고 내려와야 했다. 대부분 10층 이상 객실에 묵고 있던 대표단들이 짐을 가지고 로비로 내려오는 당시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악몽이다. 거기다가 대표단 반 이상이 정회장을 비롯하여 김각중 경방 회장, 설원식 대한방직 회장, 최화식 대한 펄프회장, 김입삼 전경련 상근 부회장 등 이미 60이 넘은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들 중 이런 상황에서 행여 건강 이상 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해야 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지만 이것이 당시 나이지리아의 형편이었다. 이런 악전 고투의 일정을 마치고 마침내 공항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이들의 마음은 금방 소리 높여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항 사정으로 우리가 탈 비행기가 5시간 정도 연발할 것이란다. 출국의 기대에 부풀었던 대표단의 실망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공항과 섭외해서 기다리는 동안 대표단이 따로 쓸 수 있는 작은 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기다려야 할 앞으로의 5시간은 50시간과도 같이 느껴지는 아득하고 먼 시간이었다. 거기다 그간 고역과 긴장 끝에 마음과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렇다고 주변 상황이 잠을 붙일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이 때 대표단 단장일 뿐 아니라 최고령자인 정회장이 나섰다. 이들의 지루한 시간을 위로할 ‘기쁨조’ 엔터테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반주도 없는 상황에서 노래를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사업 얘기도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가 아니었다. 생각 끝에 모두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는 ‘성인용 전설 따라 삼천리’를 내놓기로 한 것이다. 전에도 정회장이 격의 없는 사이의 인사들과 회식 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가끔 하는 것을 들은 이 장르의 정회장 얘기는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라도 그때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약간씩 변주해 가며 펼쳐내는, 평소 무뚝뚝해 보이는 재벌 총수 정회장의 이야기 솜씨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 번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화장실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좌중을 매료 시키는 것이었다. 얘기에 나오는 화자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말하는 인물과 상황 분위기에 맞는 가성으로 여자면 여자 목소리를 구사해 가며 이끌어 가는 그의 실력은 처음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의외성 때문에 충격에 가까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그날 라고스 공항에서 그가 한 ‘성인용 전설 따라 삼천리’를 요약 정리하여 소개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아주 커다란 대갓집이 하나 있었겠다. 그런데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것 같은 이 종갓집에도 고민이 하나 있었거든. 백방 노력을 해도 후손이 나질 않는 거야. 지성도 드려보고, 굿도 해보고 몸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어봤지만 도통 소식이 없어. 생각 끝에 씨받이도 들여보고 별 짓을 다해도 씨가 부실한 건지, 밭이 부실한 건지, 원 소용이 없는 거야. 그러다가 마님이 신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어느 깊은 산중 절에 백일 불공을 드리러 갔겠다. 근데, 참 신통하기도 하지, 백일 불공을 마친 끝에 애기가 들게 되었어. 그리곤 달이 차기도 전에 드디어 애기를 낳았어. 귀한 공주님이었지. 어째서 애가 빨리 나왔는지는 나도 몰라. 아마 애비는 하나도 안 닮았대지? 하지만 칠삭둥이면 어떻고 팔삭둥이면 어떤가. 손 귀한 집에 자식이 났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겠나? 온 동네 사람 불러다 놓고 소 잡고 돼지 잡아 큰 잔치를 여러 날 했지. 물론 그 산중 암자에도 적잖은 시주가 들어갔지.

손에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이 어느새 방년 18세를 넘어 20세의 꽃다운 아씨가 되었단 말이야. 그런데 웬일인지 이 아씨는 시집을 가질 못했어. 그러던 참에 한 두 해를 사이에 두고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 버렸어. 졸지에 큰 종가 가솔을 거느리는 가장이 된 거야. 그러다 보니 혼기를 아주 놓치고 삼십대를 바라보게 되었지. 그 시절엔 처녀가 스물을 갓 넘겨도 과년한 것으로 혼처를 정하기가 어려웠던 처지가 되어버리는 터인데 말이야. 그러던 중 여름이 다 갈 무렵 어느 날 이웃 마을에서 전갈이 왔어. 친척집에 대사가 있으니 꼭 참석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친척집 대사에 빠질 수도 없고…. 그래서 집안 종놈들 중에서 제일 잘나고 건장한 돌쇠란 놈을 뽑아서 앞세우고 나들이에 나섰겠다.

대부분 구중심처 방에만 갇혀 있던 아씨는 밖으로 나오니 마냥 신기한 것 투성이라. 산 구경 물 구경하면서 신나게 걸음을 옮겼지. 그러다 덜컥, 깊지는 않지만 개울을 만나게 되었어. 그런데 다리가 없는 거야. 돌아갈 길도 없고. 버선과 신을 벗고 맨발로 건너는 수밖에. 하지만 어찌 귀한 아씨가 맨살을 드러내고 개울을 건널 수 있겠나. 돌쇠란 놈이 망설이다 성큼 등을 내밀었지. “아씨, 제 등에 업히시지요.” 유달리 더운 날도 아니데 몇 걸음 안 가서 돌쇠는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고 온 몸에 땀이 흐르는 걸 느꼈어. 이제껏 무거운 벼 한 섬을 질 때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야. 땀이 나기 시작하고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건장한 돌쇠의 등에 납작 업힌 아씨도 어느새 돌쇠처럼 가슴이 벌렁벌렁 온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기 시작했어. 건장한 사나이의 잠뱅이에서 풍겨오는 그윽한 땀냄새에 아씨는 녹아드는 듯 점점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어. 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증상이었지.

그런데 설상 가상 이게 웬일인가. 냇가 둑에 매어놓은 소 두 마리가 참으로 해괴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바야흐로 육중한 황소란 놈이 암소 등에 올라타고는 입에서는 거품인지 땀인지를 가파르게 내뿜으며 그 짓을 거창하게 하고 있었던 거라. 돌쇠란 놈은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돌렸건만, 이게 또 무슨 조화인지 아씨는 눈이 뚫어져라 소들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자신을 업고 가는 돌쇠 등을 툭툭 치며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가빠지고 있는 숨을 억제하며 속삭이는 듯 물었겠다. “얘, 돌쇠야, 저기 저 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그렇잖아도 아가씨를 등에 업고 몸은 불같이 달아 오른 데다 원인 모를 진땀을 흘리고 있던 참에 돌쇠에게는 아찔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라. 사실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아씨의 물음에 답을 아니할 수도 없고….

순간 궁리 끝에 제 딴에는 꾀를 내어서 대답을 했지.
“아씨, 저 황소란 놈이 더운 날씨에 지금 암소란 놈의 더위를 빼주느라고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요. 저 뜨거운 열기를 못 이겨 땀 흘리는 것 좀 보십시오.”
“오호라, 그렇구나….”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씨는 고개를 연상 끄덕였지. 그러다 어느새 내를 다 건너게 되었어. 둘 다 마음속에는 내를 되돌아갔다가 다시 건너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아무도 차마 말을 못 꺼냈어. 아씨도 돌쇠도 아쉬움을 느꼈지만 별 일 없이 이웃 마을까지 잘 다녀왔어.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어. 대갓집 씨종 돌쇠는 원래 팔자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고생’을 하게 되었어. 틈만 나면 아씨가 돌쇠를 불렀거든.
“얘 돌쇠야! 너 이리 와서 내 더위 좀 빼주어야겠다. 어째 이리 날씨가 더운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 근데 참 이상하지. 어찌된 일인지 그 해 여름이 다 가고 가을도 가고 겨울이 깊어가도 아씨의 더위빼기 성화와 주문은 계속되었단 말이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11월 21일 아침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 등 2백여 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초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1년 11월 21일 아침 서울 종로구 계동 본사옆 공원에서 회사 임직원, 마을주민 등 2백여 명과 함께 간편한 옷차림으로 체초를 하고 있다./조선일보DB
정회장의 재기 넘치고 구수한 얘기가 계속되고, 듣는 사람들이 응수하며 박장 대소하는 가운데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의 5시간은 지나 갔다. 그 원전이 어디 있는 얘기를 정회장이 더 재미있게 각색한 건지 아니면 그의 순수한 창작물이었는지 필자는 알 길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얘기를 가끔 떠올리면 좀 진한 데가 있긴 하지만 해학과 휴머니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훌륭한 단편 소설의 주제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어쨌던 얼핏 생각하기에는 상상이 안가는 정회장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얘기다. 정회장은 그런 면에서까지 타고난 리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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