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03 16:10
서울 중심에 있던 수용소

인천수용소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곳이 현재 청파동의 신광학원(신광초등학교, 신광여중, 신광여고) 자리에 위치하였던 서울수용소였다. 공교롭게도 인천수용소 위치가 현재 신광초등학교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신광이라는 이름과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인연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의 위치도 인천수용소 이상으로 일제의 치밀하고도 다양한 의도를 알 수 있는 자리다.

신광여고 맞은편은 지금도 주한미군사령부를 비롯한 다수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주요 군사기지인데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용산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본은 을사늑약 후 2개 사단으로 주둔군 규모를 확대하여 1918년 조선군사령부를 발족시켰다. 그러다가 1945년 종전 직전에 일본 제17방면군 예하 조선군관구 사령부로 개편하여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더불어 신광여고 배후에 위치한 효창공원은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이 구(舊)용산고지(高地)라 부르던 주요 숙영지였다. 그렇다보니 한마디로 군사시설 한가운데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셈이었다. 지금은 용산 일대가 미군기지라는 인식이 워낙 깊지만 이처럼 훨씬 이전부터 외국군 주둔지로 이용되었고 그 시간이 어느덧 100년이 넘었다. 그나마 일본이 운용하였던 시기보다 면적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상태다.
미 군정에서 1946년 발행한 지도상에 표시한 서울수용소의 위치. 우측의 일본군 기지와 그 위쪽의 신궁과 상당히 가까우며 좌측의 효창공원은 당시 일본군의 주요 숙영지였다.
미 군정에서 1946년 발행한 지도상에 표시한 서울수용소의 위치. 우측의 일본군 기지와 그 위쪽의 신궁과 상당히 가까우며 좌측의 효창공원은 당시 일본군의 주요 숙영지였다.
이처럼 부대 한가운데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수용소가 자리 잡은 이유는 경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인천수용소처럼 주요 교통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인천수용소 부근의 인천항이 해상 물류를 위한 중요한 시설이었던 것처럼 서울수용소 일대는 그야말로 육상 교통의 중심지였다. 수용소가 위치한 서울역과 용산역 사이는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철도의 중핵 지대였다.

거기에다가 인천수용소처럼 서울수용소의 위치는 신사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는 남산의 신궁(神宮) 부근이었다. 일제는 1925년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도성과 한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남산에 한반도에 위치한 모든 신사들을 대표하는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이는 타이완신궁과 더불어 일본 본토 이외에 유이하게 설치된 시설이었다.
정동 부근에서 바라 본 신궁. 해방 직후 곧바로 철거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남산을 파헤친 흔적은 깊게 남아있다.
정동 부근에서 바라 본 신궁. 해방 직후 곧바로 철거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남산을 파헤친 흔적은 깊게 남아있다.
잊혀진 과거

일본은 식민지 수탈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자 1945년 6월 현재, 한반도 전체에 신궁 1곳, 신사 77곳, 면 단위에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다. 한마디로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한반도 지배를 영구히 하려고 한반도 곳곳을 파헤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그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시설을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위치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일제는 포로들을 이런 여러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노역에 동원하여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하였다. 많은 자료를 보면 인천수용소의 포로들은 인천항 내항 확장 공사 등에 투입되었고 서울수용소의 포로들은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각종 진지 축성 공사 등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대우가 형편없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많은 포로들이 종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부산을 통해 서울로 옮겨왔던 생존 포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
부산을 통해 서울로 옮겨왔던 생존 포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려진 그림.
전쟁 말기에 봉쇄된 일본은 물자부족이 극심하였다. 따라서 포로들에 대한 대우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지만 포로 통제를 목적으로 일부러 고통을 가중시킨 측면도 있다. 당시 내려진 훈령을 보면 수용소의 모든 시설은 기거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설비만 갖추도록 하였고 식사도 이러한 여건에 준하여 최소한만 지급하도록 제한하였다. 처음 소개하였던 탈주극도 이런 과정에서 있었던 고생이 너무 커서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인 1945년 9월 8일, 38선 이남의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미 제24군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다. 당시에도 부산이 가장 컸던 항구였고 미군이 먼저 접수한 일본에서 가장 가까웠음에도 굳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상륙 시간이 제한되고 수로도 협소한 인천으로 가장 먼저 상륙한 이유는 인천과 서울에 수용된 포로를 조속히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이들 수용소는 연합군에게도 중요한 의의를 가졌던 곳이었다.

그런데 현재 이러한 역사를 알리는 어떠한 표지나 안내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단지 치욕스러운 일제의 지배시기에 우리의 의사와 반하여 벌어진 일이어서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다는 핑계만으로 과거를 잊고 지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반성이 없이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교훈이기 때문이다.
인천수용소가 있었던 우측 하단의 신광초등학교 상공에서 바라 본 인천항의 모습. 하지만 이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과거사가 되었다.
인천수용소가 있었던 우측 하단의 신광초등학교 상공에서 바라 본 인천항의 모습. 하지만 이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과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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