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9.01 08:22

만능 엔터테이너 재벌 총수(上)

강원도 산골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출하여 쌀가게 배달 소년으로 시작하여 한국 경제사의 이정표를 바꿔놓는 엄청난 업적들을 남긴 정주영 회장. 그런 그를 생각할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다양한 면모들을 돌이켜 보면 신비감을 금할 수 없다.

사실 정주영 회장의 업무 스타일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단호하다. 생각했던 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고, 어지간한 일에는 칭찬마저 인색할 정도다. 때로는 밤잠을 못자며 일을 해도 만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일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다. 때문에 정회장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긴장된 자세로, 추호의 실수도 범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스타일은 어려운 여건이 도사린 도전적 사업의 성취는 물론 유능한 인재를 훈련하기 위한 그의 조련사 기질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정회장이 회식 자리에 나타나면 직원들은 환성을 지르며 반긴다. 이들의 환호는 일반적으로 직장 상사가 회식 자리에 낄 경우 어서 한 잔 하고 가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속에 감추고 의례적으로 하는 표현이 아니다. 진정으로 정회장의 출현을 반기는 것이다. 바로 정회장의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질 때문이다. 회식 자리라고 해서 언제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이어서 때로는 심각한 분위기에서 누군가 성토를 당하기도 하고,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을 경우는 불안한 미래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정회장이 나타나는 순간 분위기는 삽시간에 ‘회식’ 고유의 활기와 유쾌함으로 가득 찬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북돋우는 정회장의 첫 번째 메뉴는 대개 노래다. 어떤 자리에서든 마이크가 주어지면 마다하지 않을 만큼 노래를 좋아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잘하기도 한다. 미성은 아니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몸을 흔들어 정확한 음정으로 박자를 맞춰가며 열창한다. 정주영 회장이 즐겨 부르는 18번으로는 우선 윤항기의 ‘이거야 정말’을 꼽을 수 있다.

‘이거야 정말 만나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봄이 가고 여름 오면 저 바다로 산으로∼ 나 혹시나 만나려는 그 사람이 있을까/이거야 정말 만나봐야지 아무 말이나 해볼 걸’
1981년 신입사원 환영식에서 노래하는 정주영 회장(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조선일보DB
1981년 신입사원 환영식에서 노래하는 정주영 회장(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조선일보DB
그룹의 총수 입에서 이런 대중가요가 천연덕스럽게 울려 나오기 시작하면 직원들은 모두 부담감을 털어내고 재미있고 흥겨운 분위기를 타게 된다. 거기다 마이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단번에 좌중을 휘어잡는다. 분위기가 고조되면 앞으로 나온 직원들과 마이크를 든 채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이런 정회장의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이 우리 호랑이 회장 맞아?’ 하고 혀를 찬다.

정회장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데는 활기찬 리듬과 아마 기업 조직에서 직위를 초월한 구성원 간에 만나고 속을 털어놓는 소통과 ‘저 바다로 산으로’라는 진취적 표현이 가사에 들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곤 대개 송대관의 ‘해 뜰 날’이 이어진다.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사실 이 노래는 송대관의 노래라기보다는 정회장의 노래다. 그만큼 시련을 극복하고 도전 정신으로 점철된 그 자신의 역정을 대변한 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가사를 볼 때 정회장의 자서전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이나 좋아했다. 정회장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술기운을 빌어 킬킬대며 수근거린다. “더 이상 해가 어떻게 더 떠? 강원도 통천에서 맨몸으로 가출해서 세계적인 기업 그룹의 총수까지 됐는데 어떻게 더 해가 더 떠?”

이외에도 정회장은 서유석의 ‘가는 세월’도 즐겨 불렀다. 이때는 가사 내용이 그렇듯이 노래를 부르는 정회장도,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도 분위기가 다소 숙연해진다. 할일 많고 의욕 많은 그에게 막지 못하는 가는 세월이 얼마나 야속했으랴.
“아니 정회장님처럼 그렇게 바쁘신 분이 어느 겨를에 그 노래들을 다 배우셨습니까?”
그때그때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가사 하나 안 틀리고 유창하게 꿰고 있는 정회장을 보고 누가 물었다.
“서울과 울산을 오가는 차 안에서 카세트 테이프 틀어놓고 배웁니다. 회사의 젊은 식구들과 어울릴 때 아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거든요. 내가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아 주면 그들도 세대 차나 회장이다 뭐다 하는 것을 떠나 마음을 열고 다가와요. 그래서 열심히 노래를 배워요. 그들과 노래하고 어깨동무도 하고 그럴 때가 내게도 가장 행복한 때이기도 하고요.”

정회장이 가끔 부르는 노래 중 아주 분위기가 다른 노래가 하나 있었다. 미국 민요 ‘메기의 추억’이었다. 한 번은 외국 출장지에서 수행 기자들도 참석한 회식자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정회장님, 그 노래는 초등학교 음악 책에는 안 나오는 미국 노랜데 어떻게 배웠습니까?”
짓궂은 한 기자가 농을 걸었다.
“하하, 사연이 있지요. 6·25 때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피난 내려가다가 얼마간 대구에서 어떤 집 문간 방을 얻어서 있었는데 건너 방에는 역시 피난민으로 어떤 목사님이 대학생인듯한 따님과 묵고 있었어요. 난리 중에 뭐 할 일이 있습니까, 전쟁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 걱정만 태산이지. 그런데 그 목사님 따님이 이 노래를 고운 목소리로 부르는데 처음 듣는 노래지만 너무 듣기 좋더라고요. 그래서 가르쳐달라고 졸랐지요. 그래서 배운 겁니다.”
“옳거니, 그때 노래만 배우신 게 아니고 정회장님 혹시 무슨 사연도 있었든 것 아닙니까?”
“아! 아무래도 그러셨을 것 같은데 우리가 기사 안 쓰기로 오프 더 레코드를 합의 할 터이니 회장님 이실 직고하시죠!”
좌중에는 분위기가 고조된 터에 기자들이 취기를 빌어 물고 늘어졌다.

“아, 아닙니다. 사연은 무슨···. 그 여자는 어엿한 대학생인데 촌티가 질질 흐르는 별 볼일 없는 피난길 중년 영감인 내가 감히 언감생심 턱도 없는 일이었죠. 노래 가르쳐 주는 것만도 고마워 감지덕지 열심히 배웠죠. 우리 군이 북한군한테 계속 밀리는 바람에 얼마 후 그 부녀도 어디론가 떠났고 나도 부산으로 내려왔죠. 그게 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얼굴에 한 순간 옛일을 더듬는 회억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 같았다. 정회장이 ‘메기의 추억’을 부를 때 수십 년이 지나 어느덧 노령에 이른 그의 마음 한구석에 ‘옛날의 금잔디 동산’이 아닌 ‘옛날의 피난길 셋방의’ 그 여인의 모습이 노래 가사 속의 소녀 메기처럼 아직도 그의 가슴 한구석에 아련히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그냥 노래만 남은 것인지는 그 만이 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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