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26 11:05 | 수정 : 2014.08.26 18:53
1. 코드 인사로 파격 6계급 특진 해, 지금 한국에선 불가능

이순신 장군은 1590년 7월 정읍 현감(종6품)으로 있다가 6개월 동안 6계급이 특진되어 전쟁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정3품)로 부임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소령 계급에서 소장으로 갑자기 파격적인 특진이 된 것인데 이는 어린 시절 친구인 좌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가능했다. 지금 한국에선 여론의 반대로 불가능한 코드 인사다. 당시 군대 선배였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러한 파격적인 인사 우대를 받은 이순신을 질시했고, 전투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은 사이가 나빴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지금의 해군참모총장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의 상급자가 된 후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원균을 지지하는 서인들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함이 대단했다.

이순신 장군 시절의 전라좌수사는 평시에도 관할 좌수영내의 수군은 물론 민간인들도 행정, 사법 처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관할은 여수 좌수영 이외에 순천 등 10개 군이었다. 장군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이 날 것을 예측하여 함선의 수리 및 건조는 물론 각종 병기들도 수선하고 거북선도 만들었다. 이 일을 하는데 민간인들도 동원했다. 아래 <그림1>은 이순신 장군 모습이다.
<그림 1> 이순신 장군
<그림 1> 이순신 장군
2. 체벌·사형 등 강한 징벌로 군기 확립, 그러나 부대 회식 중요시

이순신 장군은 군율과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용서 없이 보통 60대~80대 이상 곤장을 쳤다. 중한 죄를 저지르면 목을 베어 죽이기도 했다. 난중일기(1592년 1월~1598년 11월)에 총 110 여회 이상 징벌 기록이 나온다. 그중 24회에 걸쳐 37명 정도가 사형 당했다. 그러나 징벌은 매우 공정하였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틈만 나면 술과 고기로 장병들을 회식시켜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과 징벌 행사로 엄정한 군기를 확립하면서 부하들을 자혜롭게 대하였기 때문에 부임 당시 썩어 빠진 군대를 단 1년 만에 세계 최강의 해군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병사들의 구타와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스마트 폰의 영내 사용 요청 등 사회가 군대 병사관리를 간섭하려는 한국 분위기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있어도 해결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3. 도요다 자동차 시스템 능가하는 함대 시스템 구축한 경영의 천재

당시 일본군은 조선군이 없는 소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칼을 잘 쓰기 때문에 함선을 상대방 함선에 맞대고 올라가 전투하는 백병전을 잘 하였다. 반면에 조선군은 세종대왕 때 제작한 고성능 화포들이 많았는데 사거리가 일본군의 소총보다 훨씬 길었다. 그래서 장군은 일본 수군 소총 사거리보다 멀리 떨어져 활쏘기와 포격전으로 초전에 제압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밑이 넓적해 회전을 잘하는 조선 수군 판옥선의 장점과 속도 위주의 유선형으로 직진만 잘하고 방향 전환을 잘 못하는 일본 수군 함선의 약점은 물론 해류 방향과 지리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함대 방향을 자주 바꾸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런 아군의 유연한 작전 구사에 적군은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총괄적으로 이순신 장군은 소수 병력과 함선으로 대병력과 대함선의 일본 수군을 격파하기 위해 아래 <그림 2>와 같이 린(Lean) 함대 시스템을 전쟁 전에 구축했다. 이 린(Lean) 함대 시스템은 지금의 도요다와 현대 자동차 시스템을 능가하는 첨단 조직 시스템이었다. Lean이란 불필요한 자원을 완전히 없애면서 자원의 사용을 극소화하는 개념이다.

<그림 2>와 같은 린 함대 구축을 위해 장군은 병사들의 훈련과 교육을 혹독하게 시켰고 군율을 어기는 자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징벌이 매우 엄했으나 사기진작을 위해 부대회식도 자주 시켰다. 이렇게 해서 장군은 세계 최고의 소수 정예 린 함대를 구축해 전쟁 내내 항상 아군보다 몇 배 또는 열배 우세한 일본 수군을 아군 피해 거의 없이 23전 23승으로 완전 격파했다. 즉 백병전 없는 과학적 시스템 경영과 전략의 승리였다.
<그림 2>
<그림 2>
4. 태산같이 조용하고 장중한 리더십으로 명량 대첩 승리

명량 해전은 전 수군통제사(해군 참모총장) 원균의 참패로 조선 수군이 거의 붕괴된 후 이순신 장군이 수군통제사의 재임명을 받은 직후의 전투이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일본 수군 133 척의 함대가 시속 20 km의 급물살을 타고 명량의 좁은 수로로 공격해 왔다. 장군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와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한다”라는 결의를 장병들에게 촉구하고 13척의 조선 수군을 아래 <그림 3>과 같이 명량 서쪽 밖에 일자진(一字陣)으로 배치했다.
<그림 3> 명량 해전도
<그림 3> 명량 해전도
10 배가 넘는 일본 수군 함선들이 빠른 물살을 타고 공격해 오자 모두 겁을 내어 한 명도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군 홀로 대장선을 지휘해 급물살을 마주치면서 나아가 전투에 임했다. <그림 3>과 같이 수로 폭이 120 m 정도로 매우 좁고 물살이 빨라 일본 수군 몇 척이 나와 장군의 대장선과 전투를 시작했다. 곧 여러 겹의 적선들로 포위되자 군사들이 겁을 먹고 하얗게 질리자 장군은 그 급박한 위기상황에도 다음과 같이 조용히 타일렀다.
“적선이 비록 많아도 우리 배를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 맞혀라.”

어느 장군이 이 같은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 큰 소리 없이 침착하고 조용히 병사들을 타이르면서 지휘할 수 있겠는가? 장군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장엄한 태산이었다. 병사들은 그 장엄한 태산이 버티고 있으니 안심이 되고 용기가 솟아 힘을 다해 공격을 계속했다. 대장선만이 적을 맞아 계속 활쏘기와 포격으로 적선들을 제압하면서 장수 부르는 깃발을 올리자 안위와 김응함 함선이 와 합세를 해 일본 수군 함선 3척을 파괴시켜 엎어 버렸다. 송여종, 정응두의 함선들도 더 합세해 적들을 완전 제압하고 바다에 빠진 일본 장군 구루지마 마치후사를 건져내어 토막토막 잘랐다. 곧 아군 함선들 전체가 북 울리고 함성 지르며 포를 쏘아 일본 수군 함선 31척을 파괴시키니 동쪽으로 퇴각해 아군이 승리하였다. 이때는 조류 방향이 서에서 동으로 바뀌어 조선 수군들이 동쪽에 있는 일본 수군들을 맹공격 할 수 있었다.

5. 명량 해전 이순신 장군 혼자만의 담력과 과학적 지략으로 대승

명량 해전이 있던 1597년 9월 16일 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은 백병전 없이 지속적인 활쏘기와 포격 지휘로 적을 완전 제압했다. 다만 안위의 함선에서는 일본 수군들이 올라와 백병전이 있었다. 그날의 일기는 승리에 대해 “이번 일은 천행이었다” 라는 한마디로 끝을 맺었다. 장군은 전쟁 내내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해 적군의 상황은 물론 해류와 지리적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정보를 이용한 과학전의 승리였다. 그날 전투에 이순신 장군 대장선의 피해는 없었고 이 충무공전서의 이분(李芬)의 행록에도 “이순신이 탄 배는 아무 탈 없이 우뚝 서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명량’ 영화에서 같이 백성들이 바다 속으로 침몰해 들어가는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구해주는 그런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당시 아군 함선의 피해는 한 척도 없었고 장병들의 사상자는 60 명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수군은 함선 31척이 완파되고 장수급 10명을 포함해 3 천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단 1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함대를 맞아 싸우는 이순신 장군의 초인적인 담력과 용기에 앞서 태산 같이 장중한 침착함으로 해류와 지리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휘하는 과학적 지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조정의 신뢰가 높던 신립과 이일 등의 명장들 거의 모두가 패배했다. 그러니 병고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도 열배 넘는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군은 장병들과 백성들에게 하느님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명량해전 승리로 일본군이 서해로 북상하여 수도권을 공격하는 전략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왕 선조는 다른 장수들은 승진시키면서 이순신 장군에게는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고 하여 포상도 승진도 없었다. 아래 <그림 4>는 명량대첩의 승리과정이다.
<그림 4> 명량대첩 승리 과정
<그림 4> 명량대첩 승리 과정
6. 이순신 장군, 지금 다시 온다면 당시 리더십 발휘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은 병고와 역경 속에서 전투마다 승리하여 장병들과 백성들의 인기가 드높아 말 그대로 영웅이었다. 이것이 당시 왕 선조와 정치 권력가들이 장군을 미워하고 모함한 이유였다. 지금 국민들은 장군 같은 영웅을 원할 것이다. 지금 이순신 장군이 다시 온다면 그 위대한 영웅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은 조일전쟁(임진왜란) 14개월 전 소령급에서 소장급으로 특진했다. 지금 한국에 이순신 소령이 있다면 단번에 소장으로 특진시킬 수 있을까? 설사 소장으로 특진해 함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하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일상의 부대 훈련과 관리 정도일 것이다.

병사들의 구타 및 인권 문제 등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 등 고급 장성들이 국회에 나가 해명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순신 장군인들 무슨 권한으로 군기를 확 잡고 <그림 2>와 같은 강한 승리 군대로 육성할 수 있겠는가? 장군의 자질도 세계 최고였지만 당시에는 장수들의 부하들과 부대 운영에 관한 권한은 막강했다.

수군통제사 원균은 일본 수군이 너무 막강하여 나가기 싫은 전투였지만 도원수 권율에게 자기 부하들 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고 출전했다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이런 강한 명령체계와 군율이 지금 한국 군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군대는 전쟁 억제와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존재한다. 승리를 위해 군대 조직은 엄정한 군기와 일사 분란한 명령체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들이 그런 군대가 되도록 군대를 신뢰하고 사랑해야 군대의 사기가 충천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 같은 영웅적 군인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 국민들이 나라 지키고 있는 군대를 존중하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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