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21 15:14 | 수정 : 2014.08.21 15:28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태준은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을 졸라맸다. 그리고 대문까지 배웅을 나온 아내에게 묵직하게 말했다.
“지금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소. 그럴 때는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미명을 헤집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지프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내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박정희는 그날 새벽을 위한 ‘특별한 임무’를 박태준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른바 ‘거사명단’에서 육군본부에 근무하는 대령 박태준을 빼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거사의 계획을 바싹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특별 임무가 하달되지 않은 이유는 ‘병력 동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서 짐작만 했다. 하지만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도저히 집에서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운명을 함께하기로 한 제자로서, 후배로서, 부하로서, 사내로서 그리고 동지로서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대로 5‧16쿠데타는 그때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복기해 볼 때 상당히 무모한 강행이었다. 총리 장면이 수녀원으로 숨지 않았거나 수녀원에 숨었더라도 전화로 진압을 지시했거나, 대통령 윤보선이 진압에 동의만 했더라도 ‘박정희의 혁명군’은 1군 사령관 이한림의 표현대로 ‘한 줌의 반란군’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사의 새벽에 박정희와 박태준이 마주친 곳은 군사혁명위원회였다.
“기어이 왔군.”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우선 상황을 완전히 장악해야지. 여기가 자네 위치야.”
즉시 박태준은 박정희의 비서실장 역할을 맡았다. 서로 말이 없어도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
어느 리셉션에서 박정희 의장, 한신 장군, 박태준 비서실장.
어느 리셉션에서 박정희 의장, 한신 장군, 박태준 비서실장.
5월 17일은 박정희에게 혼돈과 불안의 절정이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타긴 했으나 굴러 떨어지는 것이 시간문제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미 8군 매그루더 사령관이 이한림의 1군 병력을 동원해 곧 서울을 포위할 것이라는 첩보를 접한 박정희는 서울지구 방어군 사령부에 진지구축을 명령하고 1군 예하의 사단장 채명신에게 5사단을 포천에서 서울로 이동시키라고 지시했다.

5월 18일은 쿠데타가 성공으로 가는 길목에 들어선 날이었다. 1군 사령관 이한림 체포와 압송, 장면의 출현과 내각 총사퇴 의결, 육사 생도들의 혁명지지 가두행진 등이 그날 하루에 이루어졌다. 매그루더는 당황했다. 무력을 버리고 대화를 택해야 했다. 이날 아침에는 김정렬 전 국방부장관도 나섰다. 그가 박정희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매그루더 사령관을 잘 아니까 한 번 만나 보려고 하네.”
“네, 감사합니다. 그쪽의 오해를 꼭 풀어주십시오.”
박태준은 김정렬을 믿을 수 있는 선배라고 판단했다. 미리 알려주는 것에 담긴 ‘오해’를 피하고 싶다는 뜻도 냉큼 알아차렸다. 박정희가 김정렬을 향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 사연을, 박태준은 부산 시절에 박정희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1956년 7월 장군으로는 처음 육대에 입교를 했다가(박태준은 박정희가 ‘입교 당했다’는 표현을 했다고 기억함) 이듬해 무사히 졸업한 박정희가 소장 진급 심사대상자 명단에 들어서 진급심사위원회(심사위원 22명)의 심사를 무난히 통과했는데, 그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가 느닷없이 ‘사상 문제’를 들고 나와 강하게 반대를 했다. 여기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이가 김정렬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과거 사상 문제에 대해 완전히 안심해도 된다며 심사위원들을 다시 설득하고 다녔다. 그래서 소장 진급의 까다로운 관문을 어렵게 넘어선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했다.

박태준과 통화한 김정렬이 용산 미 8군 사령부로 달려갔다. 이례적으로 매그루더는 멜로이 부사령관과 같이 현관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쪽도 상당히 다급해한다는 반증이었다. 매그루더는 ‘박정희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본색’을 염려했다. 김정렬은 후배인 박정희가 군내 남로당 조직원으로 체포돼 조사 받고 있었을 때 자신이 구명운동을 벌였던 과정까지 들려주며 안심을 시키려고 했다.

매그루더를 만나고 나온 김정렬이 다시 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면담 결과를 간략히 알려주고 박정희와 만날 시간을 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김정렬은 박정희에게 매그루더와 나눈 대화를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자신은 매그루더에게 박정희 장군을 만나보라고 권유했다는 것과 매그루더는 박정희 장군에게 이한림 장군의 석방을 부탁했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5월 18일 저녁, 박정희가 비서실장과 진배없는 박태준을 불렀다. 한숨을 돌리긴 했으나 긴장과 피로가 범벅된 얼굴들이었다. 박정희가 박태준에게 의자를 권했다.
“한 고비 넘겼으니 우선 할 얘기가 있어.”
박태준이 의자에 앉자, 박정희가 담배를 물었다.
“내가 왜 혁명동지 명단에서 자네 이름을 뺀 줄 아나?”
박태준은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자네를 아끼고 믿기 때문이었어. 국가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야. 국가적인 이유는, 우리 계획이 중도에 실패로 돌아가면 자네라도 무사히 살아남아서 우리 육군을 제대로 이끌어나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개인적인 이유는, 혁명에 실패하여 내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면 내 처자를 자네한테 부탁하려 했어.”
박태준은 콧잔등이 시큰했다. 박정희가 연기 한 모금을 길게 불었다.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 다음날 장도영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부의장에 취임했다. 21일에는 혁명내각이 출범했다. 그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하겠다는 혁명공약 제3항이 맨 먼저 거리에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악으로 지목돼온 깡패 두목 150여 명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벌이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비밀 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들이 줄줄이 구속된 것이었다.
국민재건 범국민운동 촉진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장도영 의장.
국민재건 범국민운동 촉진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장도영 의장.
흔히 사람은 가장 절박한 시간을 가장 믿는 이와 함께하려 한다. 임종을 앞둔 부모가 자식을 찾고 입원한 지아비가 지어미를 찾는 것도 그러한 심정이라 할 수 있다. 5월 24일, 박정희가 박태준을 따로 불렀다. 혁명의 첫 단계를 성공했다고 확신한 그는 피로가 좀 풀린 얼굴이었다.
“오래 계획해온 우리의 역사적 임무가 이제 막 시작됐어. 자네가 내 비서실장으로 와야겠어.”
갑작스런 제안을 받은 박태준은 얼른 생각해보아도 호락호락 덤벼들 자리가 아닌 듯했다. 그가 한 발 물러섰다.
“저는 여러 모로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여보게. 우리가 택한 길은 결코 권력이나 영광을 탐하는 길이 아니야.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과제는, 국가의 골격을 바로세우고 기아선상의 국민을 구하는 것이야. 기필코 절대빈곤의 사슬을 끊고 모든 국민의 의식주부터 해결해야 돼.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한 게 가능한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거야.”
“저는 군인입니다.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지 않습니까?”
“이러한 비상 상황에서 겸손은 미덕이 될 수 없어. 대의를 위해 신명을 바쳐야 할 때야. 국가 장래에 대한 신념과 열정으로 목숨을 걸고 하자고 했던 해운대, 잊었나?”

박태준은 군인으로 일생을 마치기로 했던 자신의 인생이 이제 막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길목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는 ‘겸손’조차도 주저함이나 망설임처럼 꽁무니를 빼는 ‘비겁’으로 분류되는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박태준은 최고 권력자 박정희의 첫 비서실장이 되어야 했고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