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20 09:46 | 수정 : 2014.08.20 14:12
소위 ‘심화조 사건’의 첫 시작은 평양시 용성구역 안전부(현재 인민보안서)에서 일어났다. 발생지역 이름을 붙여 ‘용성 사건’이라고도 한다. 심화조라는 말은 간부들의 경력을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담당하는 조직을 뜻한다.

심화조 사건의 주인공인 채문덕은 당시 사회안전성(현재 인민보안부) 정치국장으로 막 임명됐다. 김정일은 그에게 김일성의 유훈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제강점 시기 아버지의 고향 만경대에 최 지주라는 지주가 있었는데 그가 아버지의 가문을 착취했다. 그의 아들 최성택은 남조선으로 달아나 군 장성이 되었고 다른 자식들은 아직도 북한에서 이력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데 잡지를 못했다. 또 광복 후와 6·25시기 악질적인 반공단체이었던 서북청년단 잔당들이 많이 남아있다….’ 김정일은 이렇게 말한 뒤 채문덕에게 그들을 꼭 잡아서 숙청하라고 지시하였다.
2013년 12월 16일자 노동신문에서 김정일 사망 2주기를 하루 앞두고 게재한 김정일의 생전 시찰 모습 사진./노동신문
2013년 12월 16일자 노동신문에서 김정일 사망 2주기를 하루 앞두고 게재한 김정일의 생전 시찰 모습 사진./노동신문
북한의 많은 고위급 간부와 인민들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의 독단과 횡포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김정일은 그들이 언젠가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다고 직감했다. 이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간부들을 숙청하고 물갈이하기 위하여 채문덕에게 심화조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전국 모든 간부들에 대한 뒷조사를 하라는 얘기다.

심화조를 조직하기 위해 먼저 선전작업에 들어갔다. ‘6·25전쟁 때 미국 지시로 훈련을 받은 서북청년단 특공대가 김일성이 있던 용성구역 건지리 최고사령부를 불시에 습격해 김일성을 테러하려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들은 무기들을 감추어 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식이었다. 이어 ‘용성구역 룡추동 뒷산에서 미국산 무기와 수류탄 및 많은 탄알들을 찾아냈다’고 TV에 방영하면서 ‘계급적 원수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전을 해댔다.

이어 1997년 초에 사회안전성 본부에 채문덕을 책임자로 하는 중앙상무조가 조직되고, 전국 모든 도·시·군 안전부들에 심화조를 만든 뒤 간부들의 경력을 재조사하라는 지시를 김정일 이름으로 하달하였다.

첫 시작은 중앙당 농업담당 비서였던 서관히에 대한 사건이었다. 그에게 1996년에 김정일로부터 비료 수입대금으로 받은 미화 300만달러를 탕진하였다는 죄목을 들이댔다. 당시 사회안전성 교화국 7교화소(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음)에서 교화생활을 하던 서관히를 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에 있는 사회안전성 구류장에 넣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결국 서관히로부터 서북청년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농사를 망치게 하려 했다는 자백과 함께 농업위원회 위원장을 하다 죽은 김만금도 공범이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또 중앙당 본부 당 책임비서 문성술이 서북청년단 부단장이었고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과 황해남도 당 책임비서 피창린, 중앙검찰소 당 비서 김기선, 강원도 당 책임비서 림형규 등 많은 사람들이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자백도 받아냈다.

곧바로 피의 숙청이 시작됐다. 평양시 형제산구역 십미리에 있는 사회주의 애국열사릉에 있던 김만금의 시체를 파내 총살했다. 문성술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안전부 구류장에 가두고 고문을 했으나 자백하지 않고 반항을 하자 설사약을 먹이고 3일동안 물 한 모금 안 줘 죽게 했다. 서윤석은 예심국 구류장에서 갖가지 고문을 가해 모든 뼈마디를 부스러뜨려 죽였다. 림형규·피창린·김기선 등도 모진 고문 끝에 총살됐으며, 가족들은 당시 사회안전성 교화국에서 관리하던 18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용성구역의 70세 이상 인민들도 대부분 서북청년단 특공대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온 관리소는 인원 수용이 한계에 다다라 1998년 여름에 함경남도 대흥군에 17호 관리소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수용자들은 야밤에 무장 성원들의 호송 하에 새 관리소로 집단 이주되었다.

평양시 강남군 안전부에서는 강남군 당 책임비서를, 자강도 희천시 안전부에서는 희천시 당 책임비서를 고문하다가 때려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

김정일은 심화조가 큰 공을 세웠다며 채문덕과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주었다. 또 심화조에서 일한 모든 성원들에게 국가수훈표창을 주며 ‘사람잡이’에 내몰았다.
김정은 집권 후 숙청된 4인방.
김정은 집권 후 숙청된 4인방.
이렇게 약 2년 동안 2만 여명의 사람들이 총살되거나 관리소로 보내졌다. 마지막 단계에서 중앙당 군수담당 비서이었던 전병호와 사법·검찰 담당 비서이었던 계응태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을 때 여론의 불만이 고조됐다. 김일성 정권에 충성했던 많은 간부들과 주민들이 다 간첩이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나라가 유지되었겠는가 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김정일은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가 합동으로 사회안전성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조사 결과 사회안전성이 진행한 심화조 사건이 오로지 채문덕의 복수심과 개인 공명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만들어냈다. 이에 김정일은 중앙당 성원들로 검열 그룹을 보강하여 강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하면서 자기는 심화조 사건을 몰랐던 것처럼 외면하였다. 그러면서 “사회안전성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며 명칭을 인민들을 보호하는 기관이라는 의미의 인민보안성으로 고치라고 지시하였다.

2000년도 초부터 시작된 반(反)심화조 조사는 7월에 채문덕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고, 9월에 사회안전성 참모장이었던 황진택(상장)과 주민등록국장이었던 박창선(소장)을 비롯한 사회안전성의 장성 10여명을 공개 체포하고, 전국 각지 안전부의 심화조에 소속됐던 약 6000여명의 안전원들을 총살하거나 교화소에 보내는 것으로 막이 내렸다.

평양시에서는 ‘김정일의 인덕정치가 관리소에 갔던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면서 피해자들을 옥류관과 연못관, 평양면옥을 비롯한 큰 식당들에 불러모아 식사를 대접하면서 위로해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토론시간 때 김정일의 인덕정치에 대한 찬양은 없고 안전원들의 악착같은 만행에 대한 규탄 목소리만 나오자 위로연을 중지시켰다.

한편 김일성 가문을 착취했다는 만경대 최 지주의 딸은 이력을 위장하고 함경북도 무산군 상업관리소 소장으로, 그의 남편은 무산군 행정위원회 국장으로, 아들은 국경경비대 부소대장으로 군사복무를 하다가 1997년 말 18호 관리소에 잡혀왔다. 이들은 이듬해 4월에 온 가족 3명이 옥수수가루(일명 속도전가루) 한 배낭씩만 메고 탈출을 하여 무산군까지 가 국경을 넘으려다가 20여 일만에 결국 체포됐다. 두달 뒤 최씨 여인은 이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을, 남편과 아들은 총살을 당했다.

북한에서는 이처럼 김일성과 김정일 시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김정은이 장성택 일파를 숙청하는 등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다. 업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들의 업보가 조만간 폭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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