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13 09:58
11. 이회영 부인 이은숙, 여공 생활과 기생들 옷 수선해 독립운동 자금 마련

1925년 경 중국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이 나고 자금을 전혀 모을 수가 없어 이회영 부인 이은숙이 자금을 마련하려고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자금을 어렵게 마련해야 했다.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다 발각되면 일본 경찰에 의해 목숨이 달아날 정도로 고문을 받아야하므로 자금 모금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귀국 이듬해 해산한 이은숙은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경영하는 공장에 여공으로 가서 일하고 때로는 술집과 유곽 기생들의 옷을 수선해주고 돈을 벌어 중국으로 자금을 보냈다. 자신은 한산 이씨 양반 사대부의 딸로 태어났고 남편은 조선 최고 귀족이며 갑부였다. 그러나 남편 이회영이 조국을 위한 독립운동으로 전 재산과 모든 것을 바쳐, 귀족 출신 이은숙은 밑바닥 천한 생활과 온갖 고생을 다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이 마냥 자랑스러웠고 존경스러웠다. 그녀는 남편과의 독립운동 생활을 <서간도 시종기>라는 책으로 저술하였다.

12. 일본 정부, 이회영 두려워 재판하지 않고 고문으로 죽이라고 명령

1932년 11월 66세의 노인 이회영은 만주군벌 장학량과 연대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선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대장(후에 원수)을 처단하려고 대련항을 거쳐 만주로 향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대련을 가는 여객선 안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66세의 노인인 이회영은 값싼 4등 선실에서 수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섞여 있었는데 일본경찰은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이회영을 지목하고 체포하였다. 누군가의 밀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회영의 단원들은 밀고한 이규서와 연충렬을 찾아내었고 백정기가 처단하였다. 이규서는 이회영의 조카였고 연충렬은 임시정부 요인 연병호의 둘째 이들이며, 또 다른 임시정부 요인인 엄항섭의 처남이었다. 단 이규서와 연충렬은 이회영을 신고한 이외에 일제에 협력한 다른 증거는 없었다.

체포된 이회영은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노인의 몸으로 고문을 받던 중 여순 형무소로 옮겨져 그 곳에서 더 모질고 혹독한 고문으로 운명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 중에도 질문에 전혀 답을 않고 모든 것은 재판에서 말하겠다고 하였다. 서방기자들이 참석한 이회영의 재판정에서, 일본이 강제 불법으로 자행한 한일합병조약 체결과 발표과정이 상세히 알려지면 국제사회의 일본에 대한 비난과 압박이 예상됐기 때문에 일본은 두려워했다. 안중근 의사도 재판과정을 거쳤으나 일본 정부는 한일합병의 전 과정을 잘 아는 이회영에게는 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죽이라고 비밀 특명을 내렸고 일본경찰은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여객선에서 체포되어 취조 중 유치장 창살에 목을 매어 죽은 이상한 노인”이라고 거짓 보도를 하였다.
이회영 선생,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중국 여순 형무소.
이회영 선생, 안중근 의사, 신채호 선생이 순국한 중국 여순 형무소.
13. 해방후 정치권력자들, 정치적 잇속 따라 이회영보다 간디 선전에 열올려

이회영이 간디보다 2살 위이니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산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간디도 부친이 인도의 작은 토후국 포르반다르의 총리를 지낸 그 지역 명문 출신이었다. 이회영은 전통 성리학과 양명학만을 공부했으나 젊어서 기독교 사상으로 개종하고 완전히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했으나 평생 힌두교 신자였고 인도의 옛 계급제도와 관습을 유지했다.

독립운동방향에서 간디는 무저항 비폭력이고 이회영은 무력항쟁이었다. 무저항 비폭력 독립운동은 거대 영토와 인구의 인도에게 아주 적합하였고 영국은 무력항쟁보다 오히려 이 독립운동을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인도에 비해 아주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의 한국에게는 간디 방법은 매우 불리하였고 일제는 한국인들이 평화적 시위를 해도 무지막지하게 살육했을 것이다. 간디 방식은 무자비한 살육과 생체실험, 위안부 동원 등을 하는 악독한 일본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이회영은 자유평화주의자이지만 무력 항쟁을 선택한 것이다.

간디는 언론이 발달하고 민주정치를 하는 영국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유럽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간디에게는 옥중생활은 있었지만 이회영처럼 혹독한 고난과 고문이 없었다. 전체주의의 악독한 독재 정치를 하는 일본에 대항하는 이회영에 관한 것을 일본 정부는 모두 감추었다. 독립 후 한국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며 권력욕이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이회영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승만은 물론 그 후 정치 권력자들도 세계 최고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이회영의 위대한 업적과 민족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대신 한국 정치 권력자들이 간디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린다고 해서 정치하는데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었다. 이회영과 간디를 비교한 아래 표를 보면 이회영이 더 위대함을 알 수 있다.
기생 옷 수선해가며 독립운동자금 마련한 대가집 마님
14. 한국의 60대는 이회영 선생과 강우규 의사를 배워야

66세 노인 이회영이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대장을 처단하기 위해 만주로 가다가 체포되어 재판과정도 없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하였을 때 나이 65세로 백발노인이었다. 강우규 의사는 동족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20년 11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김태석은 이 공로로 일제하에서 고속 승진했다. 당시 65세의 나이면 완전 고령으로 지금의 80세 이상의 노인이다. 필자는 지금 64세인데 살아온 인생이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한국은 60세 이상의 노인이 급증하여 복지비가 계속 증가되고 산업인력이 부족해 향후 국가 경쟁력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60 대여! 국가가 주는 복지혜택 받을 생각만 말고 이회영 선생과 강우규 의사의 정신을 본받아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시다. 북한 또는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20세의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만 목숨 바쳐 싸우라고 하지 맙시다. 우리 60대들 중 사회적 지도자들이 먼저 젊은 군대 시절의 ‘진짜 사나이’로 돌아가 자유 대한을 위해 총을 들고 나갑시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는가 좀 생각합시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생각납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강우규 의사는 사형 직전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란 내용으로 청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사형대 앞에서는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라는 짧은 시를 읊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래는 옥중 강우규 의사와 신임 총독에 폭탄 투하란 제목의 신문기사다.
왼쪽부터 옥중의 강우규 의사, 1919년 9월 4일자 일제기관지 매일신문 기사, 사이토 3 대 총독.
왼쪽부터 옥중의 강우규 의사, 1919년 9월 4일자 일제기관지 매일신문 기사, 사이토 3 대 총독.
조선일보는 창간된 지 6개월도 안되어 30여 번 기사 압류를 당했음에도 강우규 의사 사형선고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와 조선인들의 항거 관련 내용이 담긴 “자연의 화”라는 논설을 써 민간신문 최초로 일주일 정간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이렇게 언론을 극렬하게 탄압했으니 이회영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