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11 05:43

모병제 택한 선진국 强軍 많은데 우리는 왜 말조차 꺼내지 못하나
병영 내 가혹 행위는 구조적 문제… 군대를 良質의 직장으로 만들면
일자리 늘고 유지 비용도 줄어… 豫算 문제부터 토의 시작해야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사진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에 최대한의 경의를 보낸다. 개개인의 창의와 자유를 존중하는 데서 공동체의 번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유와 자율의 양대 덕목(德目)은 자유민주주의 삶의 본질적 가치다.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보다 우수한 사회가 된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헌법은 나라의 최고 규범이다. 국방은 한 나라의 지상 과제다. 군(軍)의 구성과 운영에 자유민주주의 헌정의 원리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 것인가는 많은 나라에 공통된 과제다. 그 핵심 주제의 하나가 징병제냐 아니면 모병제냐이다.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진다'(헌법 39조 1항)고 규정한다. 병역법은 사병은 징병제를 원칙으로 삼고 예외적으로 각종 대체 복무를 허용한다. 그 '예외'는 국제사회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이다. 종교적 양심에 기초한 대체 복무는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런가 하면 국위를 선양한 바둑·예술·스포츠 선수에게는 면제의 특전을 준다. 헌법은 또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39조 2항)고 선언한다. 그런데 실제로 군 복무자는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사회생활과의 단절, 바깥 세계로부터 격리·소외된 것 자체가 불이익이다. 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군 복무가 향후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군대가 사람을 만든다'는 전래의 경구(警句)도 왠지 허사로 느껴진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모병제가 선진국의 추세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후에도 미국 군대는 세계 최강이다. 일상의 자율도 최대한 존중된다. 일본 자위대는 물론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다. 유럽은 거의 예외 없이 모병제다. 대만도 최근에 모병제로 전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조차 끄집어내지 못하는가? 언젠가 한 정치인이 "모병제로 젊은이들에게 꿈을 돌려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어다가 무책임한 포퓰리즘으로 매도됐다.

사적(私的) 회고다. 1980년대 초임 교수 시절에 여자 교수를 채용하자고 제안했다가 '지나치게 이상적인 발상'이라며 즉시 소외당했다. 그즈음 모병제 논의를 제안하는 글을 썼다가 '국가관(國家觀)이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평판도 얻었다. '이상'이 '현실'로 구체화되면서 사회가 발전한다. 그로부터 30년이 채 못 됐다. 수많은 여교수가 탄생했지만 모병제는 여전히 금기로 묶여 있다.

한때 야간 통행금지 없이는 안보와 치안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실로 몽매한 시절이었다. 행여 징병제도 그런 게 아닐까? '피로 지킨 나라' '신성한 국방의무' '북한의 위협' 등의 장엄한 구호에 체포돼 시대의 변화와 세상의 흐름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정작 당사자인 청년 세대에게는 이런 구호가 설득력이 전혀 없다.

12명의 사상자를 낸 22사단 전방 초소의 총기 사건에 이어 두 '관심 사병'의 자살, 28사단 '윤 일병' 살해 사건…. 앞으로도 유사한 사건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병영의 가혹 행위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군대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군인의 일상이 국민 생활수준보다 너무 낮으면 안 된다. 한 방에서 혈기왕성한 청년 수십 명이 출입의 자유가 제한된 집단생활을 하면 사고가 터지기 마련이다.

모병제는 군대를 양질의 직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경찰관이나 소방대원과 마찬가지로 군인도 지원자로 선발한다. 모병제는 장점도 많을 것이다. 첫째, 수십만 개의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 둘째, 전문화를 통한 정예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다. 셋째, 군 유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도 적게 든다. 넷째, 병역과 관련된 각종 소모적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예산 문제다. 과연 얼마만큼 예산이 소요되는지, 그 예산을 다른 예산과 조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 청년들의 의식 속에는 이미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가 이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마냥 짓누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우리가 지키고 세운 나라,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후세에게 물려주는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안경환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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