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11 16:12
6. 이회영의 가문 대대로 정승, 판서 배출한 조선 최고 귀족 재벌

우당 이회영은 이조판서와 우찬성(부총리급)을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1867년에 태어났다. 조선 14대 선조 때 영의정 이항복(경주 이씨)이 이회영의 10대 조상이다. 이회영 직계조상은 영의정 이항복 이후로 대대로 정승, 판서를 지낸 조선 최고의 명문거족이나 정치적으로는 소론으로서 중립을 취했다. 또한 재력도 조선 최고여서 삼한갑족으로 불리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집안에서 대대로 총리, 부총리, 장관을 하면서 돈도 재벌급으로 많으니 정말 부러울 것이 없는 집안이었다. 일제와 조금만 타협하면 그 많은 재산의 유지는 물론 귀족으로서 권력과 공명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회영 형제들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2조원이라는 거액의 재산은 물론 하나 밖에 없는 목숨까지 모두 바쳤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육 형제 모두가 귀족의 명예는 물론 재벌급의 전 재산과 목숨까지 바친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없었다. 아래 사진은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운동에 바치는 결의를 하는 이회영의 육 형제들이고 도표는 이회영 조상의 가계도이다.
독립운동에 전 재산 2조원 헌납 결의를 하는 이회영 형제들.
독립운동에 전 재산 2조원 헌납 결의를 하는 이회영 형제들.

고종황제와 중국에 망명정부 수립한 뒤 일본에 선전포고 계획하다
7. 순종 황제가 재가하지 않은 불법 무효 한일합병조약 속여서 발표

우리 기억에 익숙한 고종황제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은 바로 이회영이 주도적으로 계획한 거사였다.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는 조약은 황제가 최종적으로 재가해야 발효가 되는데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에 재가를 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 파견 목적은 1905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조선의 외교권 박탈)은 고종 황제 재가가 없어 완전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방해로 완전 무산되었다, 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 황제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황태자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순종이다. 그 후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서명한 한일합병 조약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그 합병조약도 강제로 체결되어 원천적으로 무효였다.

순종 황제도 한일합병 조약에 최종 재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약은 국제적으로 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는 이러한 효력 불가능 사실을 완전히 숨기고 순종 황제가 재가한 것처럼 8월 29일 거짓 발표하여 백성들을 혼동에 빠트려 궐기를 봉쇄하였다. 순종 황제가 재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알려졌어도 전 백성들이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일어났을 것이고 그러면 합병은 100% 불가능했다. 무효 조약에 의한 일본의 합병 지배는 완전 불법강탈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피해 배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65년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 및 협정 등은 모두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으나 조문 해석에 한국과 일본에 차이가 있어 문제점을 안고 있다.

8. 고종황제와 중국에 망명정부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 계획

이완용 측과 일제 측은 백성들의 궐기가 두려워 마치 대한제국의 황실의 뜻에 따라 합병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속임수를 쓰느라고 이완용이 날인한 지 7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발표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합병이 황제의 뜻인 줄 알았기에 궐기를 하고 싶어도 못했다. 1918년 이회영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불법 강압에 의해 퇴위 당한 고종 황제를 중국 북경으로 모시고 가서 망명정부를 세운 후 황제가 직접 합병조약의 불법 무효임을 전 세계에 발표하고 조선의 대일본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 고종황제의 선전포고와 전쟁 명령이 있으면 조선의 전 백성들이 궐기하여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강탈당한 주권을 당당히 찾을 수 있었다. 이 계획은 정말 실현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언제 새어 나갔는지 망명 직전 고종 황제가 이완용 측이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고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이완용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막으려고 고종 황제를 독살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의 붕어로 이회영의 계획은 완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9. 형제들 사재 2조원 출연해 독립운동가 양성 위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운영

이회영은 악랄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법 강도 집단 일제와 타협과 협상은 100% 불가능한 것이고, 자주적인 독립은 군사력을 양성해서 무력으로 되찾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910년 조국을 위해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 2 조원 상당을 모두 내 놓았다. 그 2조원의 기금으로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만주에 설립하고 운영했는데 고국에서 갖고 온 기금이 1918년 바닥이 나고 만주군벌 장작림과 합세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일단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8년 간 3,500명의 위대한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여러 항일 비밀 결사대가 결성되어 일본의 주요시설 폭파와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한편, 광복군 등으로 활약하여 일본군과 일제경찰의 간담을 얼어붙게 하였다. 아래 사진은 신흥무관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이다,
신흥무관학교와 생도들의 모습.
신흥무관학교와 생도들의 모습.
10. 일제 요인 암살, 일제 군대와 시설 파괴하는 흑색공포단 조직

이회영은 지도권의 다툼이 예상되어 임정 수립을 반대했지만 처음에는 동생 이시영(건국 후 초대 부통령)과 함께 임정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했다. 이회영의 예상은 적중하여 초대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독선과 직무 유기 등으로 내분과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임정을 떠나 1925년에 비밀결사단체인 다물단을 조직했다. 65세 때인 1931년에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과 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인 항일 구국연맹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고 전위 행동단체인 흑색 공포단을 조직하였다. 이회영의 아나키즘은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종진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자유평등주의에 기초하여 자유의사에 의한 지방분권적 자치단체들이 연합한 중앙정부체제를 뜻했다, 그의 아나키즘 사상은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가장 중시했다. 흑색 공포단은 이회영이 1931년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등의 한국인 아나키스트 3명과 중국인, 일본인 아나키스트 4명 등 총 7인과 함께 결성한 항일구국연맹이었다.

이 조직은 중국내 일제 요인 처단, 일제 기관의 건물과 시설 등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행동단체였다. 이 단원들은 창단 직후인 1931년에 복건성 하문의 일본 영사관을 폭파하여 건물을 날려 버렸다. 1932년 1월 66세의 노인 이회영은 천진에 흑색 공포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천진 항에 정박해 있는 일본 군수송선을 통쾌하게 폭파시키고 천진 주재 일본 영사관 건물을 폭파하는 쾌거를 한 후 모두 무사히 본부로 귀환하여 일제경찰은 부들부들 떨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이 옥사한 후 1933년 3월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세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과 대사를 처단하려다 계획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그 중 백정기 의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 후 흑생공포단 활동은 침체되었다.
일본 요인 처단하려던 흑색공포단 백정기 의사(왼쪽 위)와 권총과 폭탄, 옥사한 나가사키 형무소(오른쪽).
일본 요인 처단하려던 흑색공포단 백정기 의사(왼쪽 위)와 권총과 폭탄, 옥사한 나가사키 형무소(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