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07 14:17 | 수정 : 2014.08.07 16:59
1. 인도 독립운동가 간디, 부인과 성관계 끊고 알몸 처녀들과 동침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마하트마 간디는 무저항 비폭력주의자이고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로 인도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869년 출생인 그는 성욕 자제를 위해 부인과의 성적관계도 끊는다고 발표도 하였다.

그러한 그는 60세 이후에도 계속되는 몽정의 속죄를 위해 알몸의 처녀들이나 새색시들과 함께 자는 의식을 종종하였다. 밤에 추우면 옷을 입으면 되는데 발가벗은 젊은 처녀들의 뜨거운 육체로 자신의 알몸을 데우는 치료로 해결을 하였다. 성교는 일체 안했다는 그는 증손녀뻘 되는 친족 처녀와도 함께 발가벗고 잠을 잤다. 간디의 이런 의식과 치료에 참여한 젊은 여인들은 간디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참여를 했다고 한다.

의식이든 치료이든 간디도 남자이므로 다수의 젊은 여인들과 발가벗고 속살을 맞대고 비빌 때의 성적 쾌락은 성행위 때보다 더 극에 달했을 것 같다. 간디의 이 방법은 서양의 회춘법(回春法)이었다고 한다. 간디는 젊어서 영국에 유학을 가 영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인도의 신지식인이었다. 마하트마 간디에서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란 뜻으로 인도의 대시인 타고르가 붙여 주었다. 아래는 젊은 여인과 춤추는 간디의 사진이다.
젊은 여인과 멋있게 춤추는 간디.
젊은 여인과 멋있게 춤추는 간디.
2. 이순신 장군도 첩이 있어…최고 귀족 갑부 이회영은 첩 없이 부인만 사랑해

2006년 ‘한겨레 21’이란 잡지에서 한·중·일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하여 현대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로 간디를 선정하였다. 10위 안에 한국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만 7위에 선정되었다. 이 결과는 간디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외국기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평생 민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는 49세에 부인 최준례 여사(김신 예비역 공군대장의 모친)와 사별 후 74세에 안두희로부터 저격 받아 운명할 때까지 25년간 여자관계 전혀 없이 홀아비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10위 안에 들지도 못했고 백범 김구가 선배로 존경한 우당 이회영은 그 이름조차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당 이회영은 조선말 명문거족의 대갑부였다, 당시 그러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은 당연히 첩을 두고 살았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첩이 있었다. 이회영은 첫째 부인 서씨와 사별 후 둘째 부인 이은숙과 재혼하였는데 그는 첩을 두지 않고 부인만을 사랑했다. 첫째 부인과의 손자로 전 국정원장 이종찬씨가 있다. 부인만을 사랑한 이회영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거액의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도 바친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1932년 11월 일본 제국 정부는 이회영을 체포했는데 그의 인품과 영혼이 너무 두려워 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즉시 죽이라고 일제 경찰에 명령하여 여순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해 죽였다.

3. 이회영 육형제 2조원 전 재산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44세의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하자고 제의했고 육 형제 모두 동의했다. 그들은 전국에서 땅 값이 가장 비싼 서울 명동 일대의 거의 모든 토지를 소유한 재벌급 거부였다. 둘째 이석영은 양부인 한양 최대 갑부 이유원(고종 때 영의정)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한양 성으로 들어올 때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대토지를 소유했다. 그 많은 전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그는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이회영 형제들은 현재 시가 2조원의 대토지를 빨리 헐값에 모두 매각하여 현금으로 만들어 만주로 가서 독립군양성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육형제 전 가족 40 여명과 기타 일꾼 등 총 60 여명이 나라 빼앗긴 통한의 1910년도 저무는 추운 12월 어느 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들은 1911년 1월 영하 30-40 도의 살을 에는 날씨에 마차 10 대에 분승해 압록강을 건너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향했다. 고국을 떠난 이들 육형제 중 오직 한 명만이 해방 후 살아 돌아와 초대 부통령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성재 이시영 선생이다. 아래는 이회영 선생과 동생 이시영 부통령의 사진이다.
우당 이회영 선생(왼쪽)과 성재 이시영 초대부통령.
우당 이회영 선생(왼쪽)과 성재 이시영 초대부통령.
4. 간디 젊은 여인들과 알몸 맞대고 비빌 때 이회영은 모진 고문으로 죽어가

간디는 보아 전쟁에 영국군으로 참전하였고 영국이 인도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수행을 지지해 많은 인도 청년들이 참전을 지원했다. 이 대가로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비폭력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하고 훈장을 받은 것이다, 성욕을 자제하기 위해 늙어가는 부인과 성관계를 끊고 대신 젊은 여인들과 알몸으로 속살을 부비면서 잠을 자는 그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었다. 백인 여제자와 사랑도 나누고 젊은 여인들과 발가벗고 이상한 의식행사를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인도에서 그의 권위는 대단했던 것 같다.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인기 속에서 발가벗은 여러 젊은 여인들과 알몸으로 이상한 의식을 행할 때 영국에서 공부한 인도의 신지식인 간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립운동으로 형무소에서 고문당해 옥사한 이회영은 지금의 재벌급 재산을 소유한 명문대 귀족으로 부귀공명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도 인간인 만큼 일본제국과 타협하여 부귀공명과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어떠한 타협과 협상도 하지 않고 가진 것 모두 다 조국에 바쳤다. 1932년 11월 간디가 젊은 여인들과 발가벗고 혼욕하고 속살을 맞대고 비빌 때 이회영은 중국 땅 여순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의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왜 한국인들은 지배자인 영국의 전쟁을 지지하고 젊은 처녀, 여인네들과 이상한 의식을 한 간디는 세계적인 위대한 지도자로 알고 있고 자기들의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원한 한국인 이회영은 잘 모르는 것일까? 아래는 여인들과 함께 있는 간디와 이회영 가족사진이다.
여인들과 함께 있는 우아한 간디(위)와 중국에서 궁핍한 모습의 이회영 가족사진.
여인들과 함께 있는 우아한 간디(위)와 중국에서 궁핍한 모습의 이회영 가족사진.
5. 이회영 조선인으로 처음 교회에서 서구식 결혼, 노비 모두 해방시켜

명문거족의 후손인 이회영은 당연히 어려서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으로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의 양명학도 적극 수용하고 일찍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20 대인 1880년대부터 벼슬길을 거부하고 조선을 자유사상으로 개방시키기 시작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마자 그는 전 노비를 해방시켜주고 정착금을 주어 자립하게 해주었다.

특히 그는 남의 집 노비들에게도 높임말을 사용하면서 존대를 해주어 진정한 만인 평등사상을 실천한 자유인이었다. 그는 유교 사상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전환하고 첫째 부인 사망 후 1908년 이은숙과의 재혼 결혼식을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 교회에서 서구식으로 올렸다. 여동생의 남편이 죽자 여동생을 거짓 사망 신고하고 곧 재혼을 시켰다. 이러한 그의 파격적인 사고와 행동은 조선 최고 귀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완전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의 변화를 이해 못하는 이들은 그를 돌은 사람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미칠 정도로 자기는 물론 조국도 변화하기를 원했다. 아래는 이회영의 패러다임 전환과정을 도표로 나타낸 것이다.(중편에서 계속)
이회영 6형제, 독립운동 위해 전재산 2조원 바치고 영양실조 등으로 한명만 살아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