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8.04 09:27
어눌한 말주변에서 달변가가 된 비법(下)

☜ 상편에서 계속

1986년 경 어느 날, 부산의 한 대학에서 정회장 초청 특별 강연회 초청이 왔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특히 노사갈등이 격앙되고 있는 시기라 재벌그룹의 총수가 거침없는 학생들과 만난다는 것이 꺼려지던 시기였다. 이 미묘한 시기에 TV 방영까지 예정돼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저, 회장님, 요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번 강연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TV 방영까지 한다는데 자칫 철없는 일로 학생들과 불미스런 언쟁이라도 붙으면….” 주위에서 우려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학생들이든 노동자들이든 만나자면 만나는 거지, 그리고 소통을 해야지. 재벌 총수가 무슨 죄인이라고 자리를 피하나!”

정회장 초청 특강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특유의 재담에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까지 적절히 섞어가면서도 강연 주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그의 여유 있는 언변 능력은 전문 강사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나 지켜보는 필자로서는 불안한 마음이 돌았다. 강연이 끝나자마자 시작될 학생들의 걸러지지 않은 거친 질문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회장의 강연이 끝나자 강한 눈빛으로 정회장을 주목하며 열심히 강연을 듣고 있던 학생들의 입에서 거침없는 질문들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재벌들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배경에는 정권과의 유착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회장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다음 질문들이 이어졌다.
“회장님, 세계가 놀라는 한국의 경제 발전은 우리 힘없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회장님이 누리고 계신 그것들을 노동자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지금 곳곳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대는 노동 쟁의의 주된 진원지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그룹의 총수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또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1986년 중앙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故 정주영 회장
1986년 중앙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故 정주영 회장
학생들 앞에서 섣부른 말 돌리기가 통할 리도 없었고, 대답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또 변명이나 회피는 정회장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저도 우리 경제의 발전의 바탕에는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 데도 고쳐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의 입장도 이해합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 노동자들의 과격한 투쟁이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손실도 크고 외국 거래선에 대한 이미지에도 타격이 큽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주장과 입장이 있듯이 경영자에게도 자신의 입장과 주장이 있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가 양보 없이 밀어 붙이기만 할 때 경쟁력 기반이 약한 많은 기업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회사가 없어져 직장 자체가 사라진 다음에 노동쟁의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처음에 질문하셨던 학생의 말처럼 과거 정권과 재벌의 관계가 소위 유착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당시 한국에서 많은 경우 그와 같은 관계를 맺지 않고는 기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잘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저희로서는 기업을 지속하고 생존하자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국 사회도 달라 질 것입니다. 그리고 장래 이러한 변화를 주도해야 할 일꾼들이 바로 여러분 학생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질문에서 나는 그런 희망을 갖습니다. 여담이지만 내가 위험과 불확실성이 도사린 중동 진츨을 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가 현대가 국내에서 정당하게 경쟁하여 공사를 땄는데도 걸핏하면 정경유착이라고들 수근 거리는 것이 듣기 싫어서였습니다. 자동차도 조선도 처음부터 목표가 세계였습니다.”
정회장의 대답은 공감 분위기 속에 그냥 넘어갔다. 정회장이 평소 철칙처럼 여기는 소신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솔직’이다. 학생들의 질문을 피해가지 않고 정면 돌파한 것 역시 그의 노회한 전략이 아니라 평소의 솔직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부산에서의 특강이 있은 며칠 뒤, 정회장은 태국에서 방한한 각료급 인사를 만나기 위해 롯데호텔을 찾았다. 이야기를 끝내고 로비를 지나는 정회장 앞을 막고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아, 정회장님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평소 안면이 있던 모 대학 교수였다.
“아, 예. 태국에서 방한한 분들이 있어서 잠시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예∼. 참 며칠 전 회장님께서 부산에서 대학생들과 토론하시는 것을 TV에서 잘 보았습니다. 참 대단하십니다. 어쩜 그렇게 말씀도 잘하시고 기지가 넘치는지…. 그리고 학생들의 질문 하나하나를 받아넘기시는 모습을 보고 참 감탄을 했습니다.”
면전에서의 칭찬이 쑥스러웠던지 정회장은 다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참 너무 당연한 일을 가지고…. 원래 나처럼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말을 잘하는 법이오. 교수님처럼 학식이 높은 분들은 머리에 든 게 많아서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틀릴까’, ‘저렇게 말하면 이렇게 틀릴까’ 마련이 많아 제대로 말을 못하지만 나같이 아는 게 없는 사람은 느끼는 대로 말하니 말이 잘 나오는 것 입니다.”
정회장이 말하는 ‘말 잘하는 비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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