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7.29 14:13
어눌한 말주변에서 달변가가 된 비법(上)

필자가 정회장을 보좌하면서 생긴 일 중 아직도 기억이 새로운 일이 하나 있다.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창립 총회’가 있었던 1974년 6월 24일 일이다. 그날은 바로 정회장이 전경련이 주관하는 공식 무대에, 그것도 국제 무대에 처음 데뷔한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전경련의 약 10명 정도로 구성된 부회장단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다소 긴장된 속에서 기대 반 우려 반 속에서 치러졌다. 정회장이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전경련의 대표로서 공식석상에서, 그것도 국제회의를 주재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에서 영향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영국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다. 수출시장은 물론 우리에게 절실했던 해외자본이나 기술력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조선분야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거기다가 런던은 미국 뉴욕과 함께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 경제계에서는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영국과 민간 경제계로 구성된 협력 기구를 결성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74년 6월 24일 ‘제1차 한영경제협력위원회 창립 총회’를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창립 총회에는 한국 경제계의 중진 대다수가 참여하였다. 또 영국측에서도 한국의 높은 관심에 호응하여 영국 측 위원장인 로타 프린트 그룹의 지오프리 니콜스 회장을 비롯하여 조선, 화학, 중공업, 금융 등 중요 부문에서 30여 명에 달하는 기업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태완선 당시 부총리, 영국 측에서는 주한 영국 대사인 윌리엄 피터슨씨가 참석하여 창립 총회의 격을 높여주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사람은 경방그룹의 고 김용완 회장이었다.

전경련의 분위기는 새로 출범하는 ‘한영경제협력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에는 업종 등이 그에 걸맞는 인사가 맡아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재계 중진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이 정주영 회장을 한국측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정회장은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이 중공업 육성에 역점이 주어지고 있던 그 시점에서 현대건설을 통해 중동 진출을 선도하여 경제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72년 현대조선을 설립, 조선 분야에 뛰어든 정회장은 조선 선진국 영국 경제계의 한국 파트너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영어 못한 정주영 첫 국제무대 데뷔 연설에서...
그러나 정회장을 위원장으로 내세우는 데는 몇 가지 우려도 있었다. 정회장은 현대건설, 현대조선, 현대자동차 등 여러 분야의 일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어 너무나 바쁜 일정 때문에 그 당시 전경련 회의에도 얼굴을 잘 내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해외 경제계 인사들과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역을 맡은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정회장이 영어는 통역을 쓴다고 하더라도 국제 경제 문제에 대한 이해나 의전 지식, 필요한 기지, 대화 기술 등에 있어서 제대로 한국 민간 경제계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우려를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정회장에 대해 공식석상에서는 물론 평상시에도 말을 아끼고 대단히 수줍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선 등 영국과 관련 분야가 정회장의 현대그룹이 가장 많기 때문에 결국 ‘한영 경제협력위원회’의 한국측 위원장으로 정회장이 선출되었다. 아직 전경련 회관이 건립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대회장소는 서울의 타워호텔 내 국제회의장으로 정해졌다.

국제협력기구의 한국측 대표로 추대되는 정회장의 이런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몇 가지 보완책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과 영국의 경제사정에 밝고 영어에도 능통한 몇 사람을 부위원장으로 선정한 것이다. 당시 부위원장으로 선정된 사람들은 한국은행의 박성상 부총재, 영국 로이드 선박 한국 대표를 맡고 있으며 영국 사정에 밝았던 협성해운 왕상은 회장, 그리고 김우근 외환은행장 등 세 사람이었다. 특히 해운과 함께 은행분야의 인사가 둘이나 포함된 것은 한국과 영국의 금융 분야 협력을 위한 포석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던 정회장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 나름대로 아주 꼼꼼하게 기본 자료와 원고를 검토하고 회의 진행 계획에 대해서도 미리 자세히 보고를 받았다. 또 개회 연설문을 어디서 어떻게 말을 끊고 통역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통역을 맡게 된 필자와 미리 계획을 세우고 반복해서 연습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대회 당일. 사회자의 개회선언이 끝나고 드디어 정주영 회장이 연단에 섰다. 정회장의 첫 국제무대 데뷔가 시작된 것이다. 회의장을 메운 한국과 영국 정·재계 인사들과 그들의 집중하는 시선, 그리고 끊임없이 터지는 보도진의 플래시, 연단을 비추는 눈부신 조명… 정회장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정회장의 개회 인사가 시작되었다, 원고를 읽기 시작할 때부터 평소보다 다소 높은 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얼굴 가까이 터지는 보도진의 플래시 조명 때문에 원고마저 잘 보이지 않는지 더듬거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연설이 시작되고 1분이 채 지났을까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잔뜩 긴장한 끝에 원고의 흐름을 놓친 정회장이 읽었던 부분을 또 읽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 서 있던 필자가 눈짓을 보냈지만 원고의 줄을 놓칠 정도로 긴장한 와중에 필자의 눈짓이 보일 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때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연설문의 원고 내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정회장이 읽고 있는 부분과 관계없이 그 다음의 내용을 영어로 통역하거나 그 상황에 그럴싸한 원고에 없는 내용으로 얼버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읽었던 곳을 또 읽고 또 읽고 하니 사람들이 마침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회장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때문에 더욱 긴장하여 다시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평상심을 회복한 정회장은 그 나머지 부분을 침착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잔뜩 긴장했던 우리 경제계 인사들의 얼굴에도 안도의 표정이 돌아왔다.

그날 이후 20년이 넘는 동안 정회장이 국제 무대에서, 국내에서 보여준 빛나는 재치와 순발력,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 실력과 화술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정회장의 국제 무대 공식 데뷔였던 그날의 한영 경제협력위원회 창립총회 이후 한국은 영국 금융업계와 조선업계의 협력을 얻어 영국을 교두보로 다른 유럽지역에까지 기술, 자본, 시장 진출을 위한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 후가 되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정회장은 넘치는 재기와 거침없는 화술로 그의 기업가 정신과 철학을 얘기하는 인기 있는 연사가 되어 있었다. 수많은 대학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고, 방송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프로그램에 담고자 했다. 심지어는 공무원 연수 교육에도 인기 높은 초청 연사가 되었다. 정회장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대부분의 초청에 응했다.(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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