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7.23 16:57

몽골제국 이야기(上)

1. 기마유목군단의 발원지 몽골고원

몽골고원은 면적 272만㎢(남한 약27배), 해발고도 1.5㎞의 고원지대다.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만주, 서쪽으로는 알타이산맥 넘어 중앙아시아, 고비사막 남쪽으로는 중국, 바이칼호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각각 접하고 있다. 오늘날 몽골(156만㎢)과 중국 내몽골자치구(148만㎢)에 대부분 속해있다.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준평원지역으로 남부에는 고비사막지대가 100만㎢를 넘고, 중앙·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수량이 많아 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몽골고원이 북방기마유목민족이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를 써 내려간 출발지이자 동시에 한민족성장 DNA 탐구여행의 길라잡이다.

몽골고원은 여름에는 40℃ 가까이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40℃이하 까지도 내려간다. 연간 강수량이 350㎜로 우리나라의 1,250㎜에 비하면 턱없이 비가 적은 지역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농경생활이 불가능하다. 넓은 초원지대에서 가축을 방목하면서 생활하는, 삶의 환경으로는 매우 열악한 곳이다. 이런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기마유목민은 우선 대단히 용감하고 동시에 영리할 수 밖에 없는 DNA를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없다.

몽골 중등국사교과서를 보자. 기원전 3세기 이후 6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에서 일어난 고대국가로 흉노(BC209~AD93), 선비(1~3세기), 유연(330~555년)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6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 건국전인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했던 국가로 투르크(돌궐, 552~745년), 위구르(745~840년), 키르키즈(840~923년), 거란(901~1125년)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후 몽골제국이 등장하였고, 북원을 거쳐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다가 1921년 몽골인민정부가 독립을 선포했다. 2차대전 후 외몽골은 몽골인민공화국으로, 내몽골은 중국의 자치국으로 각각 운명이 나뉘었다.
몽골고원의 여름(위)과 겨울.
몽골고원의 여름(위)과 겨울.
2. 세계제국 대몽골국의 건설과 흥망

몽골고원에서는 선비족이 선비제국을 건설한 이후 그 후예가 유연·북위·전연·후연 등을 각각 세웠다. 6세기 중엽 이후 돌궐·위구르·키르키즈 등 투르크족이 몽골고원을 장악하면서 선비족은 몽골고원 외곽으로 밀려 났으나 투르크 세력이 약화되는 8세기 중반부터 다시 점차 고원 중심부로 돌아왔다. 10세기 들어서는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이 몽골고원을 완전히 차지하게 했다.

몽골족은 투르크족에 의해 몽골고원에서 쫓겨난 선비족의 일파로 보여진다. 이들은 몽골고원 동부의 ‘에르구네 쿤’의 몽골인, 유연의 후예인 ‘타타르 소칸국’의 몽골인, 선비계 ‘실위인’들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10~11세기 고비사막 남북초원에 많은 몽골계 부족연합체가 형성되었고, 11~12세기에는 전몽골, 타타르,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홍기라트, 옹기라트 등의 부족이 몽골고원의 큰 세력이었다. 이 가운데 전몽골족에서「테무친 보르지긴」이란 영걸이 나타나 케레이트의 지지를 받아 메르키드를 정복하고 이후 타타르, 홍기라트, 케레이트, 옹기라트, 나이만을 차례로 격파하여 몽골초원을 통일했다. 테무친은 1206년 44세의 나이로 몽골의 대칸에 올라 칭기스칸이라 불렸고, 이로써 대몽골국이 출범했다. 서른 두 차례에 걸친 전쟁과 전투의 결과다.

칭키스칸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이끌고 금나라, 호레즘, 탕구트를 궤멸시키는 등 공포의 정복전쟁을 거듭하여 대몽골제국을 건설하였으나, 1227년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1229년 징기스칸을 이어받은 셋째 아들 우구데이는 카라코룸으로 천도하고 금을 멸망시킨 후 서역정복전쟁을 전개했다. 그는 킵차크,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등 유라시아지역을 차례로 정복하여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시베리아·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1246년 우구데이의 큰아들이 제3대 대칸으로 옹립되나 원정중에 사망하고, 1251년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인 톨루이의 큰아들 뭉케가 제4대 대칸으로 등극했다. 뭉케의 동생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형의 정복사업을 돕다 뭉케 사후 1260년 쿠빌라이가 제5대 대칸이 됐다.

쿠빌라이는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정하고 원(元)제국을 출범시켰다. 다음해 수도를 대도(오늘날 北京)로 옮기고 남송을 멸망시켜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쿠빌라이의 원나라는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고, 4대칸국까지 아우르는 아시아·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러시아 지역의 킵자크칸국은 칭기스칸의 큰아들 주치와 그 아들 바투가, 페르시아지역의 일칸국은 뭉케의 동생 훌라구가, 중앙아시아지역의 차카타이칸국은 칭키스칸 둘째아들 차카타이가, 위구르지역의 우구데이칸국은 우구데이의 남은 일족들에게 각각 지배하도록 분봉했던 땅이다.

칭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BC 4세기의 알렉산드로스, 18~19세기의 나폴레옹, 20세기의 히틀러가 다스렸던 제국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넓은 777만㎢의 땅을 정복해 세계역사상 유일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몽골제국 지도(왼쪽)와 칭기스칸.
몽골제국 지도(왼쪽)와 칭기스칸.
원나라의 쿠빌라이는 몽골의 옛 제도에 중원 왕조의 전통 정치체제를 적절히 접합시켜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했다. 이로써 칭기스칸의 대몽골국은 100년 이상 융성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 사후 황실의 후계다툼이 지속되면서 14세기 중엽에는 국정이 극도로 해이해지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됐다. 이에따라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 폭동들은 한족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이어져 주원장에 의한 명나라가 출현하게 됐다. 13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에 빼앗기고 몽골 본토로 쫓겨나 북원(北元)으로 명맥을 잇다가 마침내 나라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3. 몽골제국시대의 주변국 정세

1206년 칭기스칸이 대칸으로 추대될 당시 남중국은 남송, 만주·북중국은 금나라, 한반도는 고려, 일본은 가마쿠라시대였다. 몽골서남부는 탕구트, 서부는 호레즘제국이었다. 13세기 당시 몽골 인구는 약 200만~300만명에 불과한 반면 최대국가인 금나라는 5000만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칭기스칸은 1211년 금나라와 천하를 다투는 23년간의 대전쟁을 개시하여 1215년 금수도와 주요거점을 정복했다. 이어서 인구 2000만명의 호레즘과 탕구트(서하)마저 정복했다.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쳐서 황하 이북을 차지하면서 금나라는 황하 남부로 쫓기게 되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금나라가 차지했던 만주지역에는 세력의 공백이 생기게 됐다. 과거 요나라를 세웠던 거란족은 이틈을 타서 여진과 연합하여「대요국」을 세웠다. 이에 몽골은 거란을 공격하고, 거란은 이에 쫓기어 고려의 평안도 지방 강동지역에 들어오게 됐다. 당연히 고려군이 출병하여 거란을 강동성에서 격퇴했다. 이때 몽골군이 고려군과 협공하게 되었는데, 거란이 격퇴된 후 몽골족에서 협력한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 와중에 1225년 몽골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피살되면서 국교가 단절되고 마침내 여·몽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몽골기병은 전쟁이 없을 때는 하루 200㎞, 전쟁이 있을 때는 40㎞를 진군할 정도로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해서 전광석화 같이 전쟁과 전투를 끝냈다. 그러나 고려와의 경우는 달랐다. 두 나라는 무려 39년에 걸친 긴 전쟁을 했고, 이는 당시 몽골이 가장 어렵게 치룬 전쟁에 속했다. 이 전쟁은 몽골의 세계정복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고려를 패배시킨 원나라는 일본의 가마쿠라정권이 복속할 것을 거절하자 남송과 일본의 연합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1274년 고려와 연합군을 편성해 일본정벌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실패했다. 몽골은 일본과 베트남 정도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쿠빌라이는 1279년 인구 3000만의 남송까지 멸망시켜 마침내 세계제국을 완성했다.

대몽골제국은 세계 역사상 유일한 세계 제국이며, 그 흥망은 유라시아 일대를 대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대변혁속에서 한민족의 역사도 전개되어 갔던 것이다.
칭기스칸, 인구 300만의 몽골을 이끌고 인구 5000만명의 금나라를 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