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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아람 기자의 캔버스ㅣ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 "좋은 그림 있다면… 휠체어 타고라도 간다" 화랑街 주름잡은 여장부

입력 : 2014.07.19 07:48

아이 셋의 엄마, 무작정 뛰어들다
그림이 좋아 남편 몰래 화랑 차려… 주위선 "유한마담이 뭘 안다고"
남들이 동양화에만 집중할 때 해외작가 발굴로 新시장 개척

이젠 세계가 주목하는 '마담 리'로
매출 550억 '국제적 화랑' 키워내… 美잡지 '미술계 파워 100인'으로
"현대 한국미술계와 서구를 잇는 가장 튼튼한 가교 중 한 명이다"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
이현숙 회장은“나는 타고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많이 보면서 안목을 길렀다. 눈으로 봤을 때 편안하고 즐거운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라고 했다. 흑백이 주조를 이루는 홍승혜의 ‘온&오프’와 함께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그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빨강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어떻게 하면 작품과 자신이 동시에 돋보일지를 간파한 전문가다운‘연출’이었다. / 김지호 기자
"저 유한마담, 몇 달이나 버틸지 두고 보자."

1982년 6월, 33세의 주부 이현숙씨가 서울 인사동에 열 평(33㎡) 남짓한 '국제화랑'을 열었을 때 주변에서 이렇게 수군댔다. 그럴 법도 했다. 이현숙은 공무원인 아버지 밑에서 곱게 자랐고, 부유한 사업가 집안으로 시집가 애 셋을 키우며 온실 속 화초처럼 살던 여자였다. 그림에 관심이 있다고는 해도, 취미로 몇 점 사는 정도였다. 화랑가에서 잔뼈가 굵은 다른 화랑주들과는 '체급' 자체가 달랐다. 요컨대 그는 인사동 화랑가에서 버텨낼 성싶은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2012년 11월, 미국 미술시장 전문잡지 '아트+옥션'은 '서울 성공 스토리'라는 제목의 기사를 여섯 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잡지는 이현숙을 '현대 한국미술계와 서구를 잇는 가장 튼튼한 가교(架橋) 중 한 명'이라 평하며 이렇게 썼다.

"이현숙 대표가 30년 전 설립한 국제갤러리는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랑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 대표는 조용히 끈기 있게 뛰어난 작가군을 구축해 왔다. 아니시 카푸어, 빌 비올라뿐 아니라 루이즈 부르주아, 알렉산더 칼더 등 가장 뛰어난 서구 작가들을 소개해 왔다."

겁 없이 인사동 화랑계에 뛰어든 '유한마담'은 어느새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마담 리'가 돼 있었다. 지난해 12월엔 '아트+옥션'이 선정한 '미술계 파워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국제갤러리 매출액은 약 550억원. 국내 메이저 화랑 중 선두급이다. 이현숙(65) 국제갤러리 회장을 지난 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났다.

남편 몰래 화랑을 차리다

사무실로 들어서니 벽에 '검은 피카소'로 불리는 미국 작가 장-미셸 바스키아(1960~1988)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바스키아는 지난해 경매 낙찰 총액에서 전 세계 4위(2억5040만6917달러·약 2570억원)를 차지했다. 다른 벽에 걸린 작품은 2012년 런던 올림픽 기념탑을 설계한 영국 작가 아니시 카푸어의 것. 둘 다 국제갤러리가 취급하는 작가다.

국제갤러리는 국내 화랑 중 해외 현대미술작가의 작품을 가장 발 빠르게 소개해 온 곳이다. 국내 '1세대 화랑' 중 갤러리현대가 한국 근현대 작가, 가나아트갤러리·학고재 등이 고미술품에 주력할 때 국제갤러리는 해외 현대작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국제갤러리의 성공 비결은 '차별화'다. 초창기부터 해외 작가에 주목했다. 해외문물을 경험했던 상류층 고객과 연계해 시장을 개척하고 영역을 확보해 왔다"고 했다.

2012년 개관한 국제갤러리 제3관 모습.
2012년 개관한 국제갤러리 제3관 모습. 미국 건축가 그룹 SO-IL이 설계했다. / 사진가 김용관
―이름대로 '국제'적인 화랑이 됐다.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진·선·미 같은 좋은 단어는 다른 화랑들이 다 차지해 버렸더라. 마침 '국제'라는 화랑이 문을 닫았다. 그 이름이 괜찮을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다."

―대학 졸업 후 주부로 아이들 키우며 살림하다가 화랑을 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바람나서' 갤러리를 차린 거다. 어릴 때 미대를 가고 싶었는데 몸이 약해 포기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그림에 대한 관심은 놓지 않았다. 작가들도 만나고 작품도 사게 됐다. 시간이 지나 안목이 바뀌니 샀던 것 중 후회가 되는 것들이 있더라. 되팔려니 쉽지가 않아 차라리 내가 갤러리를 차리자 싶었다. 그래서 남편 몰래 차렸다가 나중에 이혼당할 뻔했다(웃음)."

―그 시절에 그런 결단을 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게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먹고 살려고 한 건 아니니까 장난처럼 시작했다. 솔직히 갤러리 차리는 데는 별다른 시설이 필요 없더라. 조명과 그림만 있으면 되니까."

―장난처럼 한 것치곤 장사를 매우 잘 했던 것 아닌가.

"지금처럼 화랑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작가들이 작품을 위탁하듯 하나씩 내 주면 그게 팔렸다. 미술시장도 꽤 안정돼 있었다. 신문에 전시 광고를 내면 저절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처음엔 동양화를 취급하려 했는데 가짜가 많더라. 가짜를 감별해 낼 자신이 없어서 아예 서양화만 하기로 했는데 그게 맞아떨어졌다. 첫 전시로 서양화 그룹전을 열었다. 권옥연, 김형근, 변종하, 오지호, 유영국 등이 작품을 냈는데 거의 다 팔렸다. 동양화가 대세였던 시절이라 오히려 신선하게 보였던 것 같다."

―당시 남편이 수산물 사업을 한 걸 빗대 '생선장수가 그림 볼 줄 알겠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화랑한 지 30년인데 아직도 그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수산물 사업하는 사람은 미술품 좋아하면 안 되나? 휴대전화 파는 것도 장사고, 소설가도 글 써서 팔아먹고 사는데 수산물 파는 일만 천하게 보는 건가? 우리 시댁은 국내 원양어선, 냉동수산물 수출의 선두주자였다."

이현숙 회장
아니시 카푸어, 루이즈 부르주아, 마이클 주, 로니 혼의 작품…. 이현숙 회장의 사무실은 작은 미술관을 연상시켰다. 벽에 걸린 그림은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자화상. 국제갤러리 제공 1987년 개관 5주년 기념전 때 화랑 앞에 선 이현숙. / 김지호 기자
서구 미술시장의 문을 두드리다

1980년대 말 뉴욕, MoMA(뉴욕현대미술관)에 들렀다 나온 이현숙의 눈에 그림 몇 점이 어른거렸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 작품. '그림도 크게 어렵지 않고 괜찮은데, 저 작가 전시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결심이 서면 좌고우면하지 않는 평소 성격대로, 이현숙은 무작정 뉴욕 화랑가를 찾아갔다. 헬렌 프랑켄탈러가 전속 작가로 있던 갤러리에 가서 "내가 한국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데 저 작가 전시를 하고 싶다"고 다짜고짜 들이밀었다.

마침 인사동 전세를 벗어나 소격동 지금 자리에 70평(231㎡) 건물을 마련한 이후였다. 이현숙은 자신만만하게 화랑 관계자들에게 건물 사진을 보여주며 "믿고 맡겨달라"고 설득했다. 1991년 9월 국제갤러리에서 헬렌 프랑켄탈러 개인전이 열렸다. 이 전시는 그가 해외 작가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됐다.

―그 시절에 무명의 한국 화랑이 해외 유명 작가 전시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고작 70평짜리 공간이 대단한 줄 알고 신나게 자랑했으니 걔들이 속으로 얼마나 웃었겠나. 그런데 그게 먹혔다. 동양에서 전시해 보겠다고 오는 갤러리가 없었던 거다. 작가도 '동양'이라니까 신비감을 느꼈는지 오케이를 한 거다."


―전시는 순조롭게 진행됐나.

"동의는 받았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미국에서 작품이 떠나기 전날 갑자기 난리가 났다. 당시 외신들이 북한이 전쟁할 거라고 계속 보도하는 바람에 작가가 걱정돼서 엉엉 운다는 거였다. '밖에서 볼 때만 그렇다'고 설득한 끝에 겨우 작품이 왔다. 우여곡절 끝에 개막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유명 해외 작가라고 해서 다들 겁을 먹었는데 작품 값이 생각보다 낮았던 거다. 그래서 거래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호암미술관에서도 사 가고 꽤 많이 팔았다."

―신이 났겠다.

"아니다. 부담스러웠다. 작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전시 끝나고 1주일 만에 도로 부쳐버렸다. 작가가 또 난리가 났다 '작품이 나빠서 이렇게 빨리 보내느냐'고. 원래 전시를 하고 나면 1~2년 정도 위탁 판매 삼아 가지고 있는 게 관례라고 했다. 계약서를 자세히 안 읽어봤으니 알 수가 있나. 그때는 미술품 전문 포장 업체도 없어서 떡 싸듯 둘둘 랩으로 말아 보냈다. 지나고 나니 다 추억이다. 그 전시 덕을 많이 봤다. 다음부턴 미국 화랑과 전시를 하는 일이 쉬워지더라. 그렇게 신용도 쌓이고."

이현숙이 해외 작가로 눈을 돌린 건 남편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980년대 중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후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명분은 새 사업 구상이었는데, 그 참에 아이들도 딸려서 유학을 보냈다. 영어라도 배우지 않겠나 싶었다. 그때 미국을 오가면서 보고 들은 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 미술계가 한국과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던가.

"내 눈엔 지금 남한과 북한만큼이나 차이가 나더라. 한국에선 인상파 그림을 팔고 있는데 거기에서는 칼더(모빌 창시자), 저드(미니멀리즘 작가) 작품을 전시하고 있더라. 내가 갤러리 주인인데 그때까지 칼더는 이름만 들어봤고, 저드도 책에서나 봤을 뿐이었다. 그들이 한참 앞서가는 걸 보고,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있던 한국 작품을 빨리 팔고 외국 걸로 옮겨간 거다."

1987년 개관 5주년 기념전 때 화랑 앞에 선 이현숙
1987년 개관 5주년 기념전 때 화랑 앞에 선 이현숙 / 국제갤러리 제공

"공부보다 돈벌이가 중요하다"는 억척 엄마

어떤 질문을 던져도 이현숙은 고민하지 않고 즉답(卽答)했다. 언어는 거칠었다. 그래도 명쾌해서 알아듣긴 쉬웠다. '단순한 직설화법'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거부감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외국 상대로 큰 거래를 할 때는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했다.'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작품을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상대가 오히려 잘 알아듣더라는 것이다.

이현숙은 조기유학 보냈던 세 자녀를 모두 화상(畵商)으로 키웠다. 맏딸 김태희(43)씨는 뉴욕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둘째딸 수희(40)씨는 국제갤러리 이사, 아들 창한(37)씨는 사장을 맡고 있다. 해외 아트페어에 참가할 때면 자식들이 따라가 어머니를 돕는다.

―맏딸이 고등학생 때 다음날 시험이라며 읍소해도 끝내 일하는 데 데리고 가 통역을 시켰다고 들었다.

"애들한테 그랬다. '야, 시험보다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해. 공부 대충해.' 우리 큰 딸이 그런다. '내가 만일 나 같은 엄마 만났으면 하버드 갔을 거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너 하버드 갔으면 지금처럼 성장 못 했어. 엄마 밑에서 짬밥 먹었으니까 네 밥벌이하고 사는 거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고 내가 집안을 꾸려나가기 시작한 후엔 아이들 공부도 대충 시켰다. 그래도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자라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생활력 강한 건 천성인가.

"밀어붙일 땐 앞뒤 안 본다. 젊었을 때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게 오히려 힘이 되는 것 같다. 어려운 게 뭔질 모르니 겁 없이 '그냥 해 보자'고 달려드는 거다. 애들도 그렇게 키웠다. 큰딸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유럽 여행을 갔는데, 헝가리 입국 허가가 안 나 혼자 독일에 떨어졌다는 거다. 전화로 하소연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니. 네가 알아서 해결해야지' 했다. 딸은 아직도 그때 서운했던 얘길 한다."

―화랑 경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인가.

"화랑 열고 얼마 안 돼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을 때였다. 고생 모르고 살다가 취미로 시작한 화랑이었는데, 갑자기 그걸로 먹고살아야 했다. 가장 노릇을 해야 하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나니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내 고객들이 다 망했다. 일하던 직원도 나가 버렸다. 그래서 자식들을 불러들였다."

―금융위기 때 불황 타개책으로 카페를 겸한 식당 '더 레스토랑'을 열었다.

"찻집이라도 열면 사람들이 좀 찾아올까 싶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비난이 쏟아졌다. 갤러리 하는 사람이 음식점 하는 게 흉이 되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웬걸, 레스토랑 덕에 주변 상권이 활성화되니까 너도나도 식당을 차리기 시작했다."

―일부 화랑이 기업 비자금 세탁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얘기가 가끔 나온다. 국제갤러리도 이 문제로 조사 받은 적이 있지 않나.

"우리 화랑으로선 정말 억울하고 분한 일이다. 결국 무혐의로 끝났다. 그런 인식 때문에 미술 시장이 죽는다. 그림을 사면 난리가 나는데 미술품 시장이 활성화가 되겠나. 그러니 국내에 변변한 작품 하나가 없지 않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물만 지어놓으면 뭐 하나. 걸 작품이 없는데. K팝 못지않게 한국 미술도 중요하다. 가수 싸이 이상으로 겸재, 이우환 작품이 오래 남는다."

화랑업이 우아하다는 건 '착각'

Who is 이현숙
이현숙은 4년 전부터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다. 그래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연 10회 이상 세계 최대규모 아트페어인 스위스 아트바젤을 포함한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휠체어를 타고, 아트페어도 휠체어 타고 돌아본다. 그는 "뭐 어떤가, 살살 달래가면서 걸어다니다 급할 때는 휠체어 타면 되지" 했다. 무리해서라도 직접 아트페어장에 가는 건 고객과의 관계가 중요한 화랑업의 특성상 화랑의 '간판'인 그가 얼굴을 내밀어야 손님들이 믿고 거래를 하기 때문이다.

―화랑 운영의 성공 비법은 뭔가.

"좋은 작가 보는 안목. 초보 컬렉터들이 안목 없이 예쁜 작품만 찾을 때 화랑주가 장래성 있는 작품을 추천해줘야 하는데, 안목 없이 팔다 보면 작품 값도 떨어지고 손님도 끊어진다. 나 같은 비전공자가 갤러리를 할 때는 미술 전공자를 꼭 멘토로 둬야 한다. 그리고 작가가 계속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화랑을 한다고 하면 돈 많은 집 며느리들이 '우아한 취미 생활' 하는 걸로 보는 시선이 있는데.

"남들 눈에는 편해 보일지 모르지.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젊은 작가 한 명을 키우려면 보통 3~4년 걸린다. 전시도 하고 아트페어에도 나가도록 지원해줘야 한다. 제작비, 운송료, 보험료 등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든다. 갤러리가 작품 팔러 아트페어에 한 번 나가려면 비용이 20만~30만 달러 든다. 1년에 열 번 나가면 200만~300만 달러를 벌어야 마이너스가 안 되고 '똔똔'인 거다. 발에 땀이 마를 날이 없는 거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우아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화랑업도 '장사'다. 우아한 전시회장의 이면엔 수면 아래 숨은 백조의 물갈퀴처럼 끊임없이 몸을 놀리는 갤러리스트들의 노고가 있다는 얘기다.

―고객들에게 그림을 팔면 어디에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도 알려주나.

"많이 조언한다. 아트페어 때도 컬렉터와 함께 가게 되면 외국 손님 집을 방문하도록 주선한다. 그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배치하는가를 보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방에 걸려 있는 마이클 주 작품을 가리키며) 저 작대기 같은 작품을 어떻게 놓을지 아이디어가 있겠나. 우리가 식탁이라도 놓고 연출하면 그걸 고객들이 배운다.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얘기해 주고, 가구가 안 어울리면 그에 대해서도 조언한다."

―그렇게 컬렉터 집을 드나들고 고객들과 내밀한 관계를 맺으니 화랑주와 재벌 간의 관계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게 아닌가.

"그런 예가 많지 않다. 내가 직접 가서 걸어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직원들 있지 않나. 고객들도 부담스러워한다."

―국제갤러리가 상대적으로 한국 작가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있다. 해외 작가도 이미 '뜬' 작가만 안전하게 취급한다는 평이다.

"오해다. 지난해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였던 김수자, 2012년 카셀 도큐멘타 초청작가인 양혜규가 다 우리 작가다. 해외 작가는 알려진 작가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해외의 무명작가를 우리가 키우는 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까다로운 예술가들을 상대로 일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예술가들은 자기 세계를 만드는 사람이라 남과 타협을 잘 하지 않는다. 생각해 봐라. (방 안 작품을 가리키며) 이런 걸 '예술'이라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만만하겠나. 그래도 원칙만 잘 지키면 문제없다. 작가의 의도에 맞게 작품만 잘 홍보하면 된다."

―잘 팔릴 것 같은 작가가 감이 오나.

"온다. 아트페어 나갈 때 손님들이 지난번에 못 샀는데 다음번에 사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서 가지고 나가면 딱 맞는다. 해외 작가들은 더 간단하다. 옥션에서 값이 좋으면 잘 팔린다. 올해 이우환 베르사유 전시처럼 큰 이벤트가 있으면 작품 값이 들썩인다."

―앞으로 꼭 함께 전시해보고 싶은 작가가 있나.

"리히터. 못 해봤다. 그게 내 한계다. 내가, 우리 갤러리가 아무리 잘났어도, 거기까진 힘이 못 미치는 거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지난해 생존 작가 경매 낙찰 총액(1억6588만5409 달러·약 1703억원) 1위를 차지한 독일 화가의 이름이 나오고서야, 이 거침없는 여자는 인터뷰 시작 3시간여 만에 처음으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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