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25 15:53
1. 장희빈은 과부 모친의 애인 조사석의 주선으로 입궁

장희빈의 이름은 옥정이고 역관을 지낸 인동 장씨 장경의 딸로 1659년 출생했다. 당백부(아버지의 사촌 형) 장현은 거부로 조청전쟁(병자호란)후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6년간 시종하면서 통역을 한 최고의 역관으로 종1품 숭록대부(부총리급)까지 올랐다. 당시 장열왕후 조대비(인조 계비)의 육촌 동생으로 우의정을 지낸 조사석이 있었다. 모친 윤씨가 조사석의 종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조사석의 종이었다는 것보다 조사석과 정을 통하는 애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재력가인 당백부 장현이 조사석과 친하여 장현이 일찍 과부된 동생 부인을 조사석에게 소개시켜주었다 한다. 장옥정이 미인이라면 모친 윤씨도 미인이었을 것이니 과부 미녀를 정부로 삼는데 조사석은 너무 좋았을 것이다. 이 조사석과 조사석의 외사촌 누이(동평군 모친 신씨)의 주선으로 장옥정은 대궐에 조사석의 육촌 누님인 조대비 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2. 장옥정 대궐에 들어가 나이 어린 숙종의 사랑 독차지

장옥정은 외모에 자신이 있고 조사석과 조대비 등의 후원이 있어 큰 꿈을 안고 조대비 나인으로 대궐에 들어갔다가 숙종 첫째 왕비 사망 후 1680년 젊은 20세 숙종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 장옥정은 22세로 절세 미인임은 물론 총명하고 왕을 녹일 정도로 서비스와 애교도 뛰어났다. 그러나 서인인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가 장옥정이 남인과 친한 장현의 조카딸이라 대궐에서 내쫓아버렸다. 장옥정은 명성왕후가 죽고 3년 상을 치룬 후 1686 년경에 숙종을 위로하라는 조대비의 권고로 재입궁 했다. 매일 매일 보아도 마냥 예쁘고 애교 덩어리인 애인 장옥정이 대궐에 다시 돌아오자 숙종은 날아가는 새가 된 기분이었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조선 제 19대 왕 숙종.
조선 제 19대 왕 숙종.
3. 인현왕후 자존심 상하고 질투심 일어나 장옥정에 매질도 해

숙종은 첫째 왕비가 사망한 후 노론이며 병조판서를 지낸 민유중(노론, 여흥 민씨)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여인이 인현왕후 민비로 석녀인지 아이를 못 낳았고 장옥정보다 8살이나 어렸는데도 여성적인 애교와 매력은 없었던 것 같았다. 왕은 20세 꽃다운 나이의 인형왕후는 쳐다보지도 않고 나이 많은 28세의 장옥정 처소만 찾았다. 명문거족의 딸로서 바람난 과부의 딸 장옥정에게 남편을 빼앗긴 인현왕후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불같은 질투심이 일었다. 왕후는 장옥정을 수시로 공격하였고 하급자를 시켜 매질도 하였다. 인현왕후의 질투가 날로 거세지자 숙종은 장옥정을 위해 창경궁에 따로 비밀 처소를 새로 만들었고 종4품 숙원으로 봉하였다.

4. 숙종, 인현왕후는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보다 죄질 나쁘다고 내쫓아

시기 질투심에 달아 오른 인현왕후는 숙원 장씨를 내쫓으라고 몇 번 종용도 하였으나 숙종은 오히려 장숙원을 소의(정2품)로 승격시켰다. 그러던 중에 1688년 10월 30세의 소의 장씨가 첫 왕자(이름 윤, 후에 경종)를 낳았다. 숙종은 28세나 되어서야 겨우 첫 아들을 보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고 1689년 1월 왕자 윤을 원자로 정하고 장옥정을 소의에서 정1품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평상시 숙종의 눈에 가시 같은 송시열이 이를 극렬 반대하자 죽이고 숙종은 이 기세를 몰아 노론들을 내쫓았고 권대운 등 남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그런 후 숙종은 민비를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 등 성종 때 폐비 윤씨보다 더 나쁘다고 하며 폐서인하고 내쫓았다. 이 사건이 기사환국이었다. 1690년 원자는 세자가 되고 장희빈은 왕비에 책봉이 되었다. 이제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아래는 장옥정이 왕비 되는 과정이다.
여인들의 애증을 이용한 숙종 '여인 정치'의 최대 희생자는 장희빈

5. 숙종, 최숙원 거짓 고변 이용해 남인과 중전 장씨 내치고 민씨 복위시켜

세자 생모로 중전이 된 장씨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린 무수리 최씨가 연적으로 나타났다. 이 강력한 연적은 나이가 어려 한 떨기 장미꽃인 것은 물론 애교와 말재간 등도 여간 아니었다. 최씨는 무수리에서 종4품 숙원이 되었고 인현왕후의 시녀였던 관계로 노론 김춘택의 공작책이 되었다. 그런데 김춘택 등이 중전 장씨를 몰아내고 폐서인된 민씨를 왕비로 복귀시키는 일을 하다 탄로가 났다. 남인 우의정 민암 등이 김춘택 사건을 확대하여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려 했는데 숙종은 이미 중전 장씨보다 젊은 최숙원에게 빠져 있었다.

최숙원은 노론 측의 사주를 받아 남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왕에게 거짓 고했다. 숙종은 최숙원의 고변을 이용해 세력이 커져가는 우의정 민암을 죽이고 남인들은 대거 제거했다. 그리고 아무 죄 없는 장씨 궁녀들도 여럿 죽었다. 민비는 그간 반성을 잘했다고 복위되어 대궐로 다시 돌아왔다. 이 사건이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하여 창경궁 취선당으로 쫓아버렸다. 최숙원은 두 번째 왕자 연잉군을 출산해 정2품 숙의를 거쳐 정1품 숙빈이 되었다. 아래는 장희빈, 인현왕후, 최숙빈의 출신 배경, 나이, 용모 등을 비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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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숙종, 장희빈에게 인현왕후 사망을 저주한 누명 씌어 죽여

왕비로 복귀한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1701년 음력 8월 35세로 사망했다.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왕비로 복귀시키자는 움직임이 소론에서 일기 시작했다, 노론과 연잉군의 생모 숙빈 최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막아야 했다. 최숙빈과 인현왕후 오라비 민진후 형제는 장희빈이 자신의 거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를 했다고 왕에게 고했다.

장희빈이 1699년 신당을 차리고 굿을 한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적은 세자의 두창 쾌유를 위해서였고 실제로 굿을 한 후 세자의 병이 쾌차되었다. 이 증언은 채택되지 않고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설만 채택되었다. 1701년 음력 10월 왕은 소론 영수 남구만 등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에게 자진(스스로 목숨을 끊음) 명령을 내렸고 장희빈은 자진했다. 그러나 장희빈 죽은 후 장례와 묘단장 등은 종친부 1품의 예로 실행되었다.

7. 숙종은 여인들의 사랑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숙종은 당쟁이 심한 정국을 주도하면서 어느 한 당파만을 기용하지 않고 노론, 남인, 소론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혹독한 고문 속에 죽어 갔다. 그 살벌한 정치판에서 노론에서는 인현왕후와 최숙빈을, 남인에서는 장희빈을 활용한 것이었다. 숙종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한술 더 떠 그 여인들의 사랑을 자신의 왕권강화에 교묘하면서도 야비하게 활용했다. 왕만 바라보고 살 수 밖에 없는 궁중 여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숙종에게 이용된 불쌍한 여인들이다.
왼쪽부터 장희빈(20대 경종 생모), 인현왕후 여흥 민씨, 최숙빈(21대 영조 생모).
왼쪽부터 장희빈(20대 경종 생모), 인현왕후 여흥 민씨, 최숙빈(21대 영조 생모).
8. 숙종은 정치적 타산 후 변화가 두려워 장희빈을 죽여

장희빈은 죽을 당시 나이가 43세여서 이미 매력 없는 중년여인이 되었고 그녀보다 11살이나 어리고 애교덩어리 최숙빈이 숙종에게 더 좋았다. 재력 있는 역관세력의 장희빈 친정에 비하여 최숙빈의 친정은 가난뱅이의 미천한 집안이어서 정치적 부담도 전혀 없었다. 노론 세력의 인현왕후는 이미 죽고 없었다. 남인 세력의 장희빈만 죽이면 정치세력과 연결된 여인은 없어진다. 이것저것 다 따져보아도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왕권 강화에 상책이었다.

숙종이 인현왕후 사후 장희빈을 왕비로 복귀시켰다면 그 자체가 신분질서의 변화였다.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중인 출신의 궁녀가 왕비가 되고 왕이 죽으면 대비도 되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주장처럼 장희빈의 모친이 종이었다면 종 신분의 장희빈이 왕비인 국모가 되는 것이니 천지가 진동할 사건이다. 중인이나 종 출신을 국모로 받든다는 것은 보수 노론 세력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숙종도 그것이 싫었고 한편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9. 장희빈 사후 독살 등을 통해 왕위가 계승

자신의 왕권 강화만 생각하던 숙종이 죽은 후 왕이 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소론의 지지는 받으나 생모가 죄를 쓰고 죽어 정치적으로 약하였다. 경종 이후 아래 그림과 같이 왕위 계승이 독살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다가 결국 노론의 장동(안동) 김씨에게 정치권력이 60년간 넘어가 조선은 붕괴의 길을 걷는다.
여인들의 애증을 이용한 숙종 '여인 정치'의 최대 희생자는 장희빈
10. 장희빈을 왕비로 복귀 시켰다면 조선은 아시아 최강국이 될 수 있어

장희빈이 왕비로 복귀되면 숙종 사후 장희빈은 대비가 되나 30대의 병약한 경종은 자녀도 친형제도 없었다. 그러니 이복동생 영조가 노론의 신세 안지고 순탄하게 왕위 계승을 하게 되어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은 물론 정조의 독살도 없고 영조부터 정조까지 강력한 탕평과 개혁이 이루어져 아래 그림과 같이 조선은 개국 후 최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여인들의 애증을 이용한 숙종 '여인 정치'의 최대 희생자는 장희빈
11. 새로운 변화는 옛 사람 버리고 새로운 사람의 선택으로 시작

최고경영자는 본능적으로 의심, 욕심, 변심의 3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숙종도 3심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왕권강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 여인의 사랑을 야비하게 이용하면서 환국정치를 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인 한(漢)나라를 창업한 한고조(漢高祖) 유방은 가난한 농민출신의 떠돌이였고 항우는 명문 출신의 장수였다. 유방은 몰락한 귀족 장량, 시골 말단 관리 출신 소하, 항우의 병졸 출신 한신, 피리 부는 사나이 주발, 개 잡아 죽여 돈 버는 번쾌 등 정말 변변치 못한 사람들과 함께 그 명망 높던 천하장사 항우의 군대를 이기고 전 중국을 통일했다. 유방의 사람들은 신분은 낮았으나 진정 변화와 새로운 세상을 원했던 사람들이었고 유방은 그들의 말을 믿고 수용했다.

반면에 항우는 모든 것이 유리했으나 교만하여 변화하라고 쓴 소리하는 최고의 책사 범증을 버려 패배하였다. 유방도 성공 후 3심이 생겨 공신 대장군 한신을 죽였고 한신은 죽을 때 토사구팽이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리고 장량은 산으로 도망갔다. 한국의 경영자들이여 우리의 미래를 위해 부디 3심을 없애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