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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정선 기자의 눈빛] 1000萬을 난타하다

입력 : 2014.06.21 06:56

17년 '난타' 공연… 대기록 앞둔 송승환

"장관직 왜 거절했냐고?… 청바지 못 입고 골프도 맘편히 못 치니까"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술상 두들기고
어머니가 칼로 도마 치던 모습 떠올라…
연습 지켜보던 직원 "난타구먼, 난타"
세계 두드리는 '공연 신화' 시작됐다

80년대 청춘스타, 이젠 난타 CEO
아침엔 드라마, 낮엔 연극 '에쿠우스'
저녁엔 TV쇼 MC, 밤엔 라디오 DJ…
"집안 먹여살린 소년 가장 오래 해선지
인생에 여러 낚싯대를 던지고 살았다"

통했다, 90분 축구같은 무대
난타, 6대륙 51개국 돌아
내달이면 공연 횟수만 3만회
"이미 정점 찍지 않았냐고?
13억 中시장이 있지 않나"

후속작, 망한 것도 많았죠
난타 2로 만든 비언어극 '카'
60억 들인 뮤지컬 '대장금'…
"성공·실패는 남들 평가일 뿐
인생은 원래 오르막내리막"

잘 안되는 걸 왜 계속하냐고?
"난타만 하면 돈 벌겠지만…
지금도 아침에 눈 뜨면
뭘 만들까 가장 먼저 생각해
그걸 멈추면 생존이유 없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송승환(57) 피엠씨프러덕션 회장은 이 말을 인생으로 보여준다. 17년간 두드려서 1000만명. 그가 제작한 비(非)언어극 '난타'가 세운 기록이다. 난타는 1997년 10월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해, 2003년 9월 한국 공연 최초로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전 세계 6개 대륙을 돌았다. 오는 10월 관객 1000만명을 돌파한다. 내달이면 공연 횟수로 3만 회를 넘는다.

"내가 난타이자, 난타가 나"라는 송승환을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피엠씨프러덕션 사무실에서 만났다.

“모자는 써 본 적이 없는데….” 주저하던 송승환 피엠씨프러덕션 회장은 ‘난타’의 소품인 칼과 국자를 들더니 금세 웃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피엠씨프러덕션 사무실에서.
“모자는 써 본 적이 없는데….” 주저하던 송승환 피엠씨프러덕션 회장은 ‘난타’의 소품인 칼과 국자를 들더니 금세 웃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피엠씨프러덕션 사무실에서. / 이명원 기자
"축구 90분 같은 연극으로"

"난타가 난데, 뭐 이런 것까지."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조리사복이 어색하다며 입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모자까지 갖춘 조리사 복장을 하고는 금세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1997년 초연 이후 17년 만에 대기록을 세웠으니 감회가 남다르겠다.

"첫 공연 때는 표가 거의 안 팔렸다. 호암아트홀이라고 하면 손숙이나 유인촌이 나오는 묵직한 작품을 하는 곳이란 인상이 강했는데 사물놀이 갖고 연극을 한다니까 아무도 안 왔다. 답답해서 천리안·유니텔 등 PC통신 연극 동호회에 초대권을 뿌렸다. 그러자 바로 소문이 나고 신문에 호평이 실리면서 일주일 만에 표가 다 나갔다. 하루는 초과 예약으로 입장 못 한 관객 50~60명이 로비에 몰려 유리창이 깨졌다. 깨진 유리를 정리하면서도 행복하더라."

난타는 시간에 쫓겨 급히 피로연 음식을 준비하는 주방의 왁자지껄한 소동극이다. 원제는 '인 더 키친(In The Kitchen, 주방에서)'이었다. 야채를 칼로 두들기는 연습을 보고 한 직원이 "난타구먼, 난타"라고 중얼거렸다가 제목이 '난타'가 됐다. 대사 없이 사물놀이 장단과 타악으로만 100분간 이어진다. 연 매출은 300억원, 순익이 10% 정도다. 서울 명동과 충정로, 제주도, 방콕 등 4곳에 전용관이 있다. 불경기라 공연에 관객이 들지 않는다고 울상인 요즘에도 평균 객석 점유율이 90%다. 중국·일본 등 외국인 관객은 80% 정도 든다.

―난타에 어떤 매력이 있어서 1000만명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나?

"오스트리아 작가 피터 한트케는 '연극이 축구 시합 90분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90분간 축구를 보면서 조용히 있겠나. 한 골 넣으면 환호성, 한 골 먹으면 신음이다. 연극도 그렇게 함께 흥분하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자는 생각이었는데, 그게 주효한 것 같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비언어극이 생소했다.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1995년 술자리에서 한 공연 담당 기자가 '유럽에 갔더니 두들기기만 하는 연극이 있더라'고 했다. 듣는 순간 사물놀이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술상 두들기던 모습, 어머니가 칼로 도마를 치던 모습이 생각났다. 1996년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1997년 초에 배우를 뽑아서 연습에 들어갔다."

―초기에는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재미에만 치우친다는 평도 있었는데.

"나는 해외에서 팔리는 공연 상품을 만들려던 것이지, 한국 예술을 외국에 소개하려던 게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뉴욕에서 3년 반 살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많이 봤다. 다수가 쇼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쇼가 없다. 다들 수준 높은 예술만 하려고 한다. 예술은 예술대로, 쇼는 쇼대로 즐길 수 있어야 문화가 골고루 발전하지 않겠나."

―난타는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첫선을 보이고, 오프 브로드웨이로 옮겼다가 1년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뉴욕 본토에서는 안 먹힌 건가?

"1년은 잘됐다. 뉴요커로만 채워도 1년은 돌아간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 길게 생존하려면 관광객이 봐야 한다. 뉴욕에 2박3일 관광 온 사람들은 어쩌다 하나 보는 뮤지컬로 '오페라의 유령'이나 '라이언 킹'을 선택하지, 난타를 보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겠지만."

―결국 적자를 봤는데.

"40만~50만달러 손해였다. 그래도 한국 최초 브로드웨이 진출의 꿈을 달성했고, 해외에 판매할 때마다 오프 브로드웨이 장기 공연작이라는 브랜드의 힘으로 판매가를 올릴 수 있었다. 손해 본 것 이상의 수익이 났다."

난타 공연을 십수 년 하다 보니 배우가 관성에 빠지기 쉽다. 기자가 2011년 정동 전용관에서 본 난타는 산만하고 늘어졌다. 인터뷰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명동 전용관에서 다시 봤다. 팽팽하고 활력이 있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섞여 들리는 객석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픽] 17년간 '난타' 당한 야채 개수
―3년 전 봤을 때는 어수선했다. 어제 보니 다시 손을 본 것 같다. 위기감을 느꼈나.

"사실 난타가 셰익스피어 희곡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구성이 뛰어나거나 연출이 대단한 것도 아니지 않나. 배우의 에너지로 가는 작품이다. 하지만 오래 하다 보면 에너지가 떨어지는 날이 있다. 9개 출연팀 전원을 지난 3월부터 일주일씩 연습실에 불러 점검했다. 지금도 업그레이드 중이다. 공연 끝 부분에 두들기는 검정 김치통을 하얀 플라스틱 통으로 바꾸고, 안에 LED 등을 넣어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게 바꾸려고 한다."

―난타가 51개국 289개 도시를 도는 동안 사연도 많을 것 같다.

"불이 문제였다. 프라이팬에 불이 확 붙어 타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가스를 이용한 진짜 불이다. 소방법이 엄격한 뉴욕에서는 공연을 할 때도 화재 전문가를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 주로 전직 소방수인 그들이 하는 일은 공연 후 가스 부스터에서 가스통 4개를 꺼내 그걸 캐비닛에 넣고, 다음 날 아침 캐비닛에서 가스통을 꺼내 다시 부스터에 넣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주급이 1000달러가 넘었다. 예상치 못한 비용에 난감했지만 안전 규정은 무조건 따라야 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공연 전날 그 동네 소방대장을 불러 불 장면을 시연했다. 그가 오케이 해야만 막이 올라갔다. 공연 당일 무대 양쪽에 소방관을 한 명씩 배치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서 그 나라에는 세월호 사건 같은 게 없나 싶기도 하다. 올해 초 이란 공연 때는 여배우가 히잡을 쓰라는 조건이 붙었다. 100분간 히잡 쓰고 뛰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고비도 있었을 텐데.

"초기에 배우들이 출연료를 올려주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시위한 적이 있다.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 회사는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배우들 눈에는 매일 꽉 찬 객석만 보이니 억울했던 것 같다."

―본인이 배우라 소통이 더 잘될 수 있지 않았나.

"같은 배우라 더 어려웠다. 설득하려는 생각보다 '선배인 나에게 감히 이럴 수가 있나' 싶어 야단을 쳤다. '내가 얘기했잖아, 회사가 수익이 안 난다고. 그런데 왜 못 알아듣니?' 언성이 높아지니 제작사와 출연 배우의 협상은 선후배 간 감정싸움이 돼 버렸다. 이광호 피엠씨 공동 회장이 나서서 해결했다. 이 회장은 충남방적 전무를 지내며 노조와 협상한 경험이 있어 그런 상황을 유연하게 처리할 줄 알았다."

―지금은 유명해진 배우 류승룡이 난타 1기다. 17년째 출연하는 배우도 있다던데.

"류승룡은 7~8년 주방장으로 출연했고, 3년간 조연출도 맡았다. 주방장으로 시작해 매니저로 역할을 바꾼 김문수씨가 17년 최장수 배우다. 기네스북에 올리려고 자료를 찾고 있다."

미아리 소년 가장에서 '난타' CEO로

대중의 기억 속에서 송승환은 둘 중 하나다. 80년대 스타이거나 난타이거나. 4050은 그를 '에쿠우스'로 기억하고, 지나가다 보는 아이들은 그를 보면 "야, 저기 난타다"라고 외친다.

그러나 난타의 성공 너머에는 오늘의 '송회장'을 만든 미아리 소년 가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송승환은 선생님의 손에 끌려 교실을 순회하며 국어책을 낭독하던 똑똑한 학생이었다. 1965년 3학년 때는 KBS 주최 이야기 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이어 라디오극 '은방울과 차돌이'의 차돌이를 맡으며 아역 성우로 데뷔했다.

부친의 사업이 망한 것이 그즈음이었다. 망한 사업을 구해보겠다고 나선 모친의 사업은 더 크게 망했다. 초등학생 외아들의 방송 출연료가 온 식구의 밥이요, 반찬이 됐다. 꼬마 송승환은 교실에서는 교과서 밑에 깔아놓은 대본을 외우고, 방송국 분장실에서는 시험공부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역 성우로 데뷔해 연극·영화배우, 탤런트, 라디오 DJ, TV 쇼 사회자를 오간 송승환 회장은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연극배우”라고 했다. 왼쪽 벽에 걸린 노란 액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때 붙였던 ‘난타’ 포스터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1981년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우스’에서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주인공 앨런 역으로 열연하는 모습(주먹 쥔 이).
아역 성우로 데뷔해 연극·영화배우, 탤런트, 라디오 DJ, TV 쇼 사회자를 오간 송승환 회장은 “그래도 제일 좋은 건 연극배우”라고 했다. 왼쪽 벽에 걸린 노란 액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할 때 붙였던 ‘난타’ 포스터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1981년 피터 셰퍼의 연극 ‘에쿠우스’에서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주인공 앨런 역으로 열연하는 모습(주먹 쥔 이). / 이명원 기자·피엠씨프러덕션 제공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천성이 낙천적이라 그랬는지,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그랬는지, 그때는 재미있었다. 연기하는 게 신기했고 재밌는 일 하면서 돈 벌어 엄마 아빠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어차피 난 쓸 곳도 없는 돈이었으니까."

―대학교를 2년 만에 중퇴하고(그는 한국외국어대를 1996년 명예졸업했다) 탤런트, 영화배우, 쇼 MC 등 동시에 여러 일을 했다.

"아침에 일일연속극 촬영을 하고, 낮에 연극 '에쿠우스' 공연을 하고, 저녁에 '젊음의 행진' MC를 하고, 곧바로 라디오 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를 하는 식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어려웠기 때문에 리스크(risk·위험) 관리 감각이 저절로 붙었다. 낚싯대 하나만 놓고 사는 인생은 불안하다. 드라마 섭외가 안 오면 라디오 DJ, DJ 섭외가 끊기면 쇼 MC,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좋아하는 연극이라도 한다는 식으로 동시에 여러 낚싯대를 던지고 살았다."

―1985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3년 반을 보냈다. 한창 각광받던 시절에 왜 떠났나.

"그 무렵 부모님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또 망했다. 살던 집을 뺏기고, 그때까지 번 돈을 전부 날렸다. 빚쟁이를 피해 부모님께 돈암동 사글세 방을 얻어 드리고, 친구 집에 얹혀 지내려니 모든 게 허무했다. 20대라 넓은 물에서 많이 보고 느끼고 싶은 지적인 욕망도 있었다. 그래서 다 접고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사는 동안 벼룩시장에서 시계 장사를 했다고 들었다. 잘나가던 스타가 좌판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카시오나 롤렉스 짝퉁을 도매상에서 5달러에 떼다가 10달러에 파는 식이었다. 처음 하는 장사라 그랬는지 재미있었다.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싫어도 해야 했고. 2년간 열심히 팔았다. 나중에 한인방송이 생기면서 방송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다."

1989년 귀국해 만든 회사가 '환퍼포먼스'였다. 연극 밑천을 벌어보려고 일단 음반 제작과 콘서트 기획에 뛰어들었다. 강수지의 데뷔 앨범 '보랏빛 향기'를 만들었고, 이승환, 변진섭, 조덕배, 봄여름가을겨울 콘서트를 올렸다. 돈이 좀 모였다 싶으면 연극에 갖다 부었다. 1995년 슬럼프에 빠지는 듯했던 그를 일으킨 것이 술자리에서 얻은 난타 아이디어다. 이듬해 휘문고 동창 이광호씨와 1억원씩 투자해 피엠씨프러덕션을 차렸다. 이광호 공동 회장은 당시 재벌급이던 충남방적 창업자의 셋째 아들. 송승환이 부탁하면 1억 정도는 '부담없이' 빌려주던 그는 "연극도 돈이 된다"는 송승환의 얼토당토않은 꼬드김(?)에 순진하게도 넘어가고 말았다.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송승환이 실컷 작품 만들고 구상하는 동안, 계산기를 두드리고 직원과 배우를 관리하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이 회장의 세심한 내조 덕에 5명으로 출발한 회사 직원이 200명으로 늘었다.

'성공시대' 출연 거절한 이유

난타로 성공을 거둔 그를 인터뷰하면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은 '망했다'였다. "아, 그거 망했죠", "네, 그거 엄청 망했죠." 작품이 망했다는 말을 이렇게 편하게 하는 제작자도 드물다. "믿는 구석인 난타가 있어 그런가"라고 묻자 "이것저것 망해도 난타가 버텨준다는 든든한 자만심이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난타 후속작이 오래전에 나왔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다. '난타 2'로 만든 비언어극 '카(car)', 하회탈이 소재인 '탈' 등이 잇따라 실패했다. 난타를 만든 감과 경험이 있었을 텐데, 지나치게 자만한 것은 아닌가.

"헝그리 정신이 부족했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었다. 타악을 소재로 난타 이상 가는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제작비 60억원을 들여 화려하게 만들고도 혹평을 받은 뮤지컬 '대장금'도 있다.

"주연으로 누구를 써도 이영애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관객은 각자가 기억하는 인상 깊은 장면이 안 나오면 시시하다고 했다. '대장금' 실패를 통해서 드라마나 영화를 뮤지컬로 바꾸려면 20년 이상 지난 후에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지난해 괴도 루팡이 주인공인 창작 뮤지컬 '루팡'은 대본부터가 미달이었다. 공연의 달인에게서 그런 실패작은 왜 나오나.

"줄거리에서부터 음악까지 전부 수준 이하라 안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대관 일정이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완성된 대본과 음악 나오기 전에는 대관을 하지 않는다."

―그러느니 난타에 집중하지 왜 잘 안 되는 걸 계속하나.

"난타만 하면 회사 수익은 더 많이 날 것이다. 직원도 200명까지 필요 없으니 인건비부터 확실히 줄 거다. 하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공연을 만들어 왔고, 지금도 아침에 눈 뜨면 '뭘 만들까'를 제일 먼저 생각한다. 그걸 멈추는 건 내 생존의 이유가 없어지는 거다. 요즘도 내년, 내후년 예정으로 기획 중인 작품이 7~8개나 된다."

―가장 아프고 큰 실패는 무엇인가.

"거만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 스스로는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과 실패는 남들 평가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방송국에서 집요하게 나오라고 하는데도 안 나간 프로그램 중 하나가 '성공시대'다. 내겐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고 오르막내리막이다."

피로연 음식을 급하게 만들게 된 요리사 4명의 흥겨운 소동극인 ‘난타’ 공연 장면. 송승환 회장은 “앞으로 중국 13억 관객이 다 볼 때까지 더 세게 두드리겠다”고 했다.
피로연 음식을 급하게 만들게 된 요리사 4명의 흥겨운 소동극인 ‘난타’ 공연 장면. 송승환 회장은 “앞으로 중국 13억 관객이 다 볼 때까지 더 세게 두드리겠다”고 했다. / 피엠씨프러덕션 제공
문화부 장관? 난타 CEO가 더 좋다

―2011년 이명박 대통령 때 문화체육부 장관에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시 임태희 대통령 실장이 집으로 찾아가 삼고초려했는데도 거절했다고 하던데.

"장관을 하려면 희생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제일 힘든 것은 청바지에 맨발, 운동화 차림으로 다닐 수 없다는 것이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사는 삶은 견딜 수 없다. 좋아하는 골프를 못 치는 것도 힘들 것 같더라. 늦잠 자고 오후에 출근해도 되는 자유를 50년 넘게 누려 왔는데, 1~2년 장관 하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공직을 맡아 그간의 경험을 정책으로 풀어보는 것도 큰 기회이지 않나.

"(유)인촌형이 장관 하는 동안 옆에서 지켜보니 마음이 있다고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더라. 힘이야 실무자가 있겠지. 장관이 하란다고 다 하는 것도 아니고."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에 들어오라고 박근혜 당시 위원장이 직접 전화했다던데.

"전화를 받으니 그분 목소리라서 당황했다. 그래도 참여하지는 않았다. 거기도 청바지 입고 나갈 자리도 아니고."

―정부의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이다. 일해 보니 어떻던가.

"우리나라가 대형 사건이 많아 문화를 융성하기 힘든 것 같더라. 문화에 관심 가질 만하면 뭔가 뻥뻥 터지니 우선순위에서 늘 밀린다."

[그래픽] Who is… 송승환
―난타의 미래는 무엇인가? 정점을 치면 내려올 일밖에 없는데.

"나는 난타를 아직 1000만명'밖에' 안 봤다고 생각한다. 13억 중국 시장이 있지 않은가. 정점까지는 멀었다."

―배우, 탤런트, DJ, MC, 공연기획자 등 이제까지 했던 일 중 딱 하나만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나.

"역시 배우다. 그중에서도 연극배우. 영화나 드라마는 2~3분 토막토막 촬영해 편집한다. 연극은 1시간 40분간 집중한다. 쾌감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다. 그런데 연극만 하면 돈이 안 되니까 제작도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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