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19 08:16 | 수정 : 2014.06.19 09:38

대선 출마(上)

정 회장은 타계하기 몇 해 전에 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이 대통령에 출마했던 일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심경을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대통령에 출마했다 낙선한 것을 내 인생의 결정적 실패라고 말하는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쓴 고배를 들었고 보복 차원의 시련과 수모도 받았지만 나는 실패한 것이 없다. 실패자는 우선 그를 선택해서 국가 부도를 맞아 고통을 받은 국민이고, 그 다음은 국가를 부도 낸 대통령으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사람이 가장 큰 실패자다. 나는 단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

그는 말미에 “나는 내 평생 늘 그랬듯이 내가 확신을 가졌던 바를 위해 세평에 연연하지 않고 해봤다”라고 덧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통해 일관되었던 도전과 행동원칙, 그리고 정신이 그대로 나타난 말이다. 국민이 정 회장 대신 선택한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세계 경제환경과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의 호황, 무역환경, 환율, 원유와 주요 원자재값 안정 등에 힘입어 당시 한국 경제의 선진국 진입 기반을 확실히 다질 수 있는 호기를 무산시키고 국가를 부도 내어 국민을 혹독한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지속된 박정희 정권에서는 강력하고 일관된 정부정책 주도하에 재벌 기업들을 독려하여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공업기반을 구축하고 수출을 증대시킴으로써 백 달러에도 못 미쳤던1인당 국민소득을 1만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올렸다. 수출주도 성장 정책,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개발 독재’의 개가라고 평가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정부 주도 경제정책은 부분적인 왜곡은 있었다 치더라도 경제성장 목표에 맞추어 제한된 투자 재원을 일관되게 효율적으로 배분, 투입하는 등 한국의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부분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1992년 3월 22일 당시 국민당 정주영 대표가 서울 등지에서 개최된 정당연설회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92년 3월 22일 당시 국민당 정주영 대표가 서울 등지에서 개최된 정당연설회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조선일보DB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것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 1987년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는 약 12년간의 신 군부 정권 통치 시기는 한국경제에 있어서 국민경제적 당위성이나 자유시장경제의 원칙보다는 집권 세력이 그들의 정치적 입지와 권익을 위해 민간 경제계 위에 군림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력 집중, 부정 축재 제재, 기업 통폐합, 인허가, 세금, 금융 제재 등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명분과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민간 경제계 위에 군림하는 집권 세력의 이러한 막강한 영향력은 필연적으로 불법 정치자금과 정경 유착을 유발시켰고 경제정책이나 경제의 시장기능에 모순과 왜곡을 가져 왔다.

이러한 와중에서 특히 이들에게 고분고분 하지 않았던 일부 한국의 대기업들은 엄청난 고충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정 회장이 거느린 현대그룹의 기업군이 한국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리고 마침 이 시기 10여 년에 걸쳐 한국 민간 경제계의 중심인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어 명실상부 한국 민간 경제계의 대표라 할 수 있었던 정주영 회장은 매번 그 격랑의 중심에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부조리와의 타협을 싫어하는 정 회장의 강한 성격은 집권 세력의 핵심 인물들과의 갈등과 대립을 더욱 격화시켰다. 전두환 신 군부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전경련 회장 사퇴압력, 기업 강제 통폐합 등 그들의 압력에 정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달리 고분고분히 응하지 않고 반발하자 신 군부 실세 일부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현대그룹을 싹 쓸어 버리겠다”라며 위협을 했던 일화는 당시 그들이 민간 경제계를 보는 의식구조와 함께 정 회장과의 갈등의 정도를 잘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권에서 비롯되는 격동과 부조리를 항상 그 중심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정 회장은 그것을 헤쳐나오며 단지 비분강개하는 아픈 경험으로만 간직하지 않았다. 그의 심중 한편에는 이러한 체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정치 풍토의 개선, 보다 잘 할 수 있는 국가 경영과 경제정책 아이디어가 차근차근 쌓여가고 있었다. 그는 평생 그가 처한 위치와 틀에 스스로를 가두어 두지 않고 닥쳐오는 시련과 도전에 분명히 대응하며 언제나 획기적인 발상과 아이디어, 그리고 무서운 행동력으로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수한 업적들을 남긴 사람이다.
1992년 3월 28일 오후 당시 정주영 대표 등 국민당의 14대 총선 당선자들이 당선자대회에 앞서 당사 현관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92년 3월 28일 오후 당시 정주영 대표 등 국민당의 14대 총선 당선자들이 당선자대회에 앞서 당사 현관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조선일보DB
이러한 그의 극적인 삶의 궤적으로 볼 때 그가 정치에 직접 나서서 그의 경륜을 펼쳐 볼 꿈이 싹트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정치꾼이나 군인에게 나라를 맡겨 피해자나 방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정치에 나서보는 것이었다. 그는 점차 그것이 그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해야 할 일생 일대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기성 정치인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 출마 결심을 술회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책임제에서 나라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나라의 선장인 대통령에 달려 있다. 크게 비약해야 할 21세기의 문턱에서 경제는 중병에 걸려 있고 잘못된 정치는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그들은 권력을 막강한 힘으로만 알고 막중한 책임에 대한 인식은 없다. 한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의 경제력인데 정치는 잘못되고 있는데 경제만 잘 나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그냥 앉아서 정치하는 사람들 욕이나 하며 내 자신과 내 기업의 안전만 도모하는 것이 소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근로자의 의욕과 기업인의 열의,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정치를 개혁하고 선진 한국, 통일 한국을 완성해 보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자 목표다. 그리고 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고 성공할 자신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엄청난 시련 가운데 기업을 성공시켰듯이 나는 새롭게 도전할 일감으로 5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위한 정치 참여를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나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존경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 인품을 부러워한 일은 있지만 대단한 권력에 존경심을 품거나 그것을 부러워해 본 일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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