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6.12 14:11

10세기 초에 초원을 통일하고 거대북방유목국가를 건설한 거란(契丹)제국 이야기

1. 동호계 기마군단 거란의 기원과 흥망

선비족은 몽골고원에서 흉노를 제압하고 대제국을 건설했으나 3세기 ‘단석괴’ 사후 분열되었다. 한편, 중국은 삼국시대를 진(晋)이 통일하나, 혼란기에 선비를 비롯한 흉노ㆍ갈ㆍ저ㆍ강등 북방유목민족이 화북으로 남하하여 「5호16국시대(304~439)」가 전개된다. 이 시대는 439년 ‘선비족 탁발부’가 화북을 통일하여 북위를 건국함으로써 종식되고 「남북조시대(429~589)」가 열렸다.

거란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시라무렌강 유역에 살던 동호계 민족으로 선비족의 한 갈래다. 거란은 동쪽의 고구려 서쪽의 돌궐 양대세력 사이에 끼여 세력을 키워나갈 수 없었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동돌궐과 당나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당나라 말기에 본격 세력을 키우게 된 거란은 영걸 ‘야율아보기(요태조)’가 부족을 통합하고 916년 제국으로 출범했다.

923년 돌궐세력을 축출하고 몽골고원을 대부분 장악한 야율아보기는 924년 여진을 제압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켜 강성한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발해 원정 중 사망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아율덕광’은 936년에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연운16주를 차지하고 후진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거란은 동아시아 최강국가로 등장했다. 이때 거란이 차지한 북경은 이후 금, 원시대를 거쳐 1368년까지 유목민이 지배했다. 947년 국호를 「대요국」으로 하였으나 덕광이 전쟁 중에 죽고 혼란에 빠지면서 중국 전체정복의 기회는 사라졌다.

거란은 태평양 연안에서 알타이산맥, 만리장성에서 헤를렌강 북부까지 광대한 땅을 차지했고 몽골계 유목민, 여진족, 발해유민 등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여 대제국을 건설했다. 한편 송화강유역에서 부상한 퉁구스계 여진족은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한 후 송과 연합하여 1125년 거란을 멸망시켰다.
거란영역(몽골의역사,동북아역사재단)
거란영역(몽골의역사,동북아역사재단)
2. 거란시대의 국제정세
거란의 발흥 경로는 이전의 흉노ㆍ선비ㆍ돌궐 등 북방유목국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고, 이어 부족을 통합하며, 다음은 몽골고원을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중국왕조와 쟁패하는 것이다. 북방민족이 중국을 통치한 것이 북위ㆍ요ㆍ금ㆍ원ㆍ청의 다섯 왕조로, 진ㆍ한나라 이래 중국역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10세기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북방민족 거란은 916년 요를 건국했고, 한민족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 삼국을 통일했다. 중국에서는 5대10국시대가 마감되고 960년 송나라가 건국됐다.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 간에 7세기에는 돌궐-고구려-당이 삼각구도를 형성했다. 당시 당나라(618~907)가 돌궐과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동아시아를 평정했다. 그러나 8세기에는 후돌궐과 후고구려(발해)가 다시 등장하여 당과의 삼각구도가 이어졌다. 9세기에는 거란이 세력화하게 되어 당나라는 발해(698~926)와 거란이라는 양쪽의 적대세력과 대치하게 됐다.

10세기에 이르러 다시 거란-고려-송의 삼국구도가 재연된 것이다. 이처럼 북방민족-한민족-중국왕조 간에는 시대별로 여러 국가가 등장하고 상호 교류-협력-투쟁하면서 역사를 전개해왔다.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고려가 지켜낸 역사
3. 거란과 한민족의 역사적 관계

거란은 선비족의 한 그룹이며, 선비족은 동호에서 기원하고, 동호는 예맥의 후대 이름이며, 예맥은 고대 한민족이다. 그래서 거란은 한민족과 혈통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강성하여 국가를 이룬 10세기 초 이전의 거란과 우리의 관계 기록은 많지 않다. 한민족과의 역사적 조우를 보면 거란은 고구려와 대치했고 국경을 맞댔으나 당시 강성한 고구려 때문에 거란세력은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10세기 초 요제국을 건설한 거란은 926년 발해를 공격해 불과 달포 만에 멸망시켰다. 이로써 한민족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져 내려온 만주일대에 대한 영토권을 상실했고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강성한 거란과 고려가 등장하게 되는데 두 나라간 갈등의 상징인 만부교사건(942년)이 일어났다. 거란이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내왔으나 태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 하여 사신은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아래 매어 굶겨 죽였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발해에 대해 민족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발해멸망 후 많은 유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욱일승천하는 거란, 후당에서 후진으로 이어지는 중국왕조, 고구려후예 발해의 멸망,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삼국통일 등 역사적으로 거대한 사건들이 10년 남짓 사이에 잇달아 벌어졌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해 살펴야 한다.

거란ㆍ고려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중국도 송나라에 의해 통일됐다. 만주지역에 있던 말갈족은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북만주지역은 동여진, 압록강하류지역은 서여진이 각각 차지했다. 당시 여진이 차지한 압록강 하구는 송나라, 거란, 고려 삼국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송나라는 거란을 공격하나 실패했고(986-989), 고구려는 송의 참전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991년 거란은 서여진을 정복하고 압록강하류를 차지했다. 송나라와 여진을 제압한 거란의 다음 수순은 말할 것도 없이 고려 침공이었다.

993년 거란의 동경유수 소손녕이 이끄는 대군이 고려를 침공한 이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1019년)까지 양국 간 전쟁은 26년간 지속했다. 고려 성종은 신하들과 할지론과 항복론을 논의했으나, 중군사인 서희는「선 항전 후 협상」을 주장하면서 소손녕과의 회담에 나섰다. 이 담판에서 소손녕의 주장은 ①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옛 고구려 땅은 거란에 돌려 줄 것 ②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할 것 등 두 가지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①고려라는 국호와 고구려 옛 수도인 평양에 서경을 두는 등 고려는 고구려 계승국이다 ②압록강주변에 여진이 있어 거란과 교류가 어려우므로 여진 영토를 고려가 확보하면 거란에 사대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서희의 탁월한 외교로 고려는 나라를 지키고 전쟁을 막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강동6주의 강역을 확보하게 됐다.

1010년 거란 성종은 다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친정을 하나 실패하는 둥 여섯 차례에 걸친 침략전쟁에 모두 실패하고 양측은 강화하게 됐다.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고려가 지켜낸 역사
거란의 요나라 역사를 기록한 정사가 원나라 때 기록된「요사(遼史)」다. 여기에 한민족과 관련된 특별한 기록이 있다. 요사 지리지인 권 38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지금의 랴오닝성 요양)에 대한 기록이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동경 요양부는 본래 조선땅이다. <여기서 조선은 물론 고조선을 의미한다. 고조선의 존재와 영역에 관한 기록이다.> ②조선은 40여대를 전해 내려왔다.(傳四十餘世) <단군은 신화가 아닌 역사이며, 단군이 한 사람이 아니고 왕조의 수장으로 이어져 왔음을 말해준다.> ③연나라사람 위만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이는 위만의 땅이 동경(요동)지역으로 고조선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④한무제가 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는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⑤요나라 동경이 고구려 수도인 평양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지역이라고 우리가 아는 것과 명백히 다른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북방 기마민족 거란 역시 한민족과 고대로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앞으로 북방민족과 한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에 의해 역사적 실체가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