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시켜 뭐해… 늘어나는 '불량 맘'

입력 : 2014.05.28 05:32

세월호 사태 이후 느슨해진 엄마들… 교육보다 건강 강조하는 인식 커져
"하루라도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

"제 손으로 빽빽하게 썼던 아이 학습 계획서를 온 가족 보는 데서 찢어버렸어요. 뉴스를 보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저녁이에요. 딸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하율아, 너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거 그만할게. 대신 내 곁에 오래오래만 있어줘' 했죠."

스스로를 '논현동 극성 엄마'라고 칭했던 김시영(42)씨는 '세월호 사태'가 터진 직후 아이가 다니던 학원을 모두 끊었다. 영어 학원·독서 학원·창의력 학원에 보낸 건 물론이고, 발레·피아노·미술·승마까지 사교육으로 가르쳐왔던 그녀다. 김씨는 "아이가 '다니기 싫다'고 칭얼댈 때도, '넌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아직 몰라. 그러니 엄마 말 들어'라고 다그쳤는데, 이젠 그만하겠다"고 했다. "무슨 소용인가 싶더군요.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주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이제서야 안 거죠."

공부시켜 뭐해… 늘어나는 '불량 맘'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세월호 사태'의 비극 이후 엄마들은 분노했고 전율했다. 이를 투표로 보여주겠다는 '앵그리 맘'이 선거판을 달궜다면, 요즘 일상생활에선 '불량 맘'이 화두다. 출간하자마자 육아서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닥치고 군대 육아'의 저자 김선미씨는 "세월호 사건 이후 블로그엔 '이젠 아이를 그만 잡고 싶다. 하루라도 행복하게 키우겠다'는 엄마들의 쪽지가 빗발친다"면서 "느슨하게 평화롭게 아이를 키우는 '불량 맘'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엄마들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타이거맘→불량맘

재작년 초까지만 해도 육아 시장의 키워드는 '타이거 맘'이었다. 자녀를 엄하게 통제하는 엄마를 일컫는 말로, 중국계 미국 엄마이자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가 펴낸 책에서 시작됐다. 그 뒤를 잇는 키워드는 자녀와 대화를 나누며 아이의 뇌 발달을 돕는다는 '유대인 엄마'. 최근엔 아이의 감성을 키워주는 '북유럽 엄마', 아이를 어른처럼 존중한다는 '프랑스 엄마'가 잠시 뜨더니 세월호 참사 이후엔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불량 맘'이 대세를 이뤄가고 있다.

국내 최대 육아 사이트 '맘스홀릭', 육아 포털 '베이비트리' 등에서 '불량 맘' '세월호'로 검색하면 '사교육에 그만 매달리겠다'는 제목의 엄마들의 글이 수십여건 뜬다. 아이디 '팅커'는 "아이가 곁에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합니다. 제발 남들과 비교하지도, 재촉하지도 맙시다"라고 썼다.

서점가를 지배하는 육아 책도 최근엔 '자녀 학습'보단 '엄마 인성'에 집중하는 쪽에 가깝다. '부모가 된다는 것'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엄마의 빈틈이 아이를 키운다' '엄마 무릎 학교'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불안한 엄마→느긋한 엄마

불량맘 십계명.
한국워킹맘연구소 이수연 소장은 "'불량 맘' 열풍은 워킹 맘들에게도 회자되고 있다"고 했다. "육아와 직장 생활을 동시에 해내기 버거운 워킹 맘일수록, 아이에게 공부보단 행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육아 트렌드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내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를 함께 키우고 지키자'는 움직임이 생긴 것도 주목할만 하다"고 했다.

놀이터나 공원에서 아이를 맘껏 놀리겠다는 엄마들도 '반짝' 늘어났다. 서울 서초동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강지원(40)씨는 "안에서 교과 활동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신나게 놀 수 있게 해달라'는 엄마들의 요구가 부쩍 많아졌다"고 했다. 한글과 셈, 영어를 가르치는 일반 유치원 혹은 영어 학원 대신 자연에서 뛰노는 '숲학교'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에선 '불량 맘' 열풍이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EBS 강영숙 PD는 "세월호 사태로 엄마들이 사교육 욕심을 내려놓겠다고 말한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무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철 유행으로 끝나면 소용이 없죠.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바뀌려면 결국은 교육 제도와 시스템이 함께 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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