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21 04:22
바둑은 품성 교육에 정말 그만이다. 아이들조차 이기고도 전혀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 바둑에서 이겼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리모니’를 하던 옛날 나의 바둑생활이 생각난다. 그것뿐인가.
“열 길 상수 속은 알아도 한 길 하수 속은 몰라.”
“하수는 상수가 하기 나름이야.”
“옛날에는 상수의 그림자도 안 밟았다는데 요즘 하수들은······.”
“이번 스승의 날에는 무엇을 선물할 거지?”
“연말에 백을 뺏기면 하수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안 돼.”
등 온갖 언어폭력을 하수에게 구사했던 과거가 반성된다.

바둑은 과학과 여러 측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 하루 아침에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이 똑같다. 실력 차이가 큰 경우 밤을 꼬박 새워 준비한 하수가 자다가 일어난 상수를 결코 이길 수 없다.

과학도 시험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들이 자기 과목을 시험 공부할 필요가 없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내 교육관이다. 벼락공부가 먹히지 않는 출제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바둑으로 말하면 어떤 정석을 얼마나 외웠나 보다 사활문제를 얼마나 잘 푸나 평가한다고나 할까.

바둑돌이 주위에 미치는 ‘힘’은 물리학적으로 전하가 주위에 미치는 전기력과 같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변에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전기력을 미치는 (+) 전하와 흑돌을 동일시할 수 있다.
전하에 비유되는 바둑돌.
전하에 비유되는 바둑돌.
그렇다면 흑돌이 미치는 (+)의 ‘힘’은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숫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림에서는 이해하기 좋게 흑돌로부터 한 칸 떨어진 곳의 ‘힘’의 크기를 40으로 잡았다. 돌에서 먼 곳일수록 ‘힘’의 세기가 현저하게 감소함을 알 수 있다.
흑돌이 미치는 (+) 힘의 크기.
흑돌이 미치는 (+) 힘의 크기.
바둑은 둘이 두는 스포츠다. 따라서 흑이 두면 다음은 백 차례다. 여기서 백돌은 (-) 부호를 갖는 ‘힘’을 작용한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백돌이 놓이면 흑돌이 미치는 (+)의 ‘힘’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쇄시킨다.
흑돌의 (+) 힘을 상쇄하는 백돌의 (-) 힘.
흑돌의 (+) 힘을 상쇄하는 백돌의 (-) 힘.
이런 식으로 바둑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음은 물론 논문 작성이나 소프트웨어 제작도 가능하다고 본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내 블로그를 참고하기 바란다.

바둑판은 가로세로가 똑같이 19줄이어서 총 19 x 19 = 361집을 갖게 된다. 중앙의 ‘천원’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모두 360집이 되는데 이는 1년이 약 360일이라는 천문학적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흑과 백이 어우러지는 바둑은 음양오행 이론에 기반을 둔, 우주를 형상화한 스포츠다. 나는 지금도 가끔 바둑의 정석들을 보며 어느 동양 별자리와 비슷한지 체크해 본다. 천문학자의 직업병(?)이라 할까.

프로기사들은 바둑을 잘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들이 얼마나 훌륭한 ‘신선놀음’을 하고 사는지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프로기사가 아무리 바둑을 잘 둬도 9단이 끝인 것은 하늘이 9개(9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태호복희가 5500년 전에 창시한 음양오행 우주의 원리도 바둑판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바둑은 정말 심오한 스포츠다.
태호복희의 음양오행 우주를 묘사한 바둑판.
태호복희의 음양오행 우주를 묘사한 바둑판.
바둑계가 잘하는 것 중 하나는 아마추어들을 우대한다는 점이다. ‘바둑 TV’를 보면 프로와 아마추어가 조화를 이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참으로 현명한 처사라고 본다. 가끔 한심한 바둑을 두는 아마추어를 두둔해주는 해설에서 프로의 배려를 느낀다. 아마추어 축구팀이 많은 나라 국가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우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바둑계는 동네 바둑학원 원장이 입문하는 아이들에게 프로 기사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일 수 있다는 점도 받아들인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영재들을 박사들에게 갖다 맡기는 것이 영재교육은 아니다. 초등학교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일은 초등학교 교사들이 프로이고 박사들은 아마추어인 것이다. 내가 송유근의 멘토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등학교 아래 과정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천문학은 다른 과학과 달라서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이 많다. 과학 분야에는 사실 아마추어가 설 땅이 그다지 넓지 않다. 아마추어 수학자, 아마추어 물리학자, 아마추어 화학자 같은 말을 독자들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천문학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다.

나는 바둑계로부터 교훈을 얻어 아마추어 천문학자들을 위한 배려에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어 한국천문연구원의 소백산천문대나 보현산천문대만큼 시민천문대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초창기에 만들어진 대전시민천문대나 영월 별마로천문대 등은 모두 내 손때가 묻은 곳들이다.

내가 한국천문연구원장이던 2010년 한국아마추어천문학회와 공동개최한 대한민국 별축제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우리 천문학계에서도 프로와 아마추어가 손을 잡으면 대형 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2010년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성황리에 열린 대한민국 별축제 광경.
2010년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성황리에 열린 대한민국 별축제 광경.
옛날 복덕방 영감님들의 툇마루 놀이에 불과했던 바둑을 이제는 글로벌 인터넷 업체가 운영하고 있다. 이런 세상을 내다보고 먼저 업체를 차린 업체는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이런 사실은 ‘창조경제’에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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