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20 05:17

1970년대 한국경제의 전시장이었던 현대조선 현장

“박 군 외국에서 경제사절단이 한국에 오면 그들의 관심분야가 조선사업과 관심이 있든 없든 반드시 현대 조선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
1970년대 중반 전경련 국제부에서 국제경제협력 위원회와 경제 사절단 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에게 정 회장이 틈 있을 때 마다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 전경련은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태리, 스칸디나비아 각국을 포함해 약 13개 국가의 전경련과 성격이 같은 주요 민간 경제 단체들과 민간주도 경제협력 위원회를 결성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아직 너무 몰라. 특히 투자든, 무역, 기술 제휴, 자본협력이든 한국이 그들의 경제협력 파트너로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 몰라. 이런 점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한국 경제계 인사들이 열심히 해외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을 불러들여 한국을 보게 해야 돼. 그러면 사업 협력 분위기는 자연히 생기게 되는 거야.”

정 회장은 전경련의 이러한 민간주도 국제 경제협력 사업에 각별한 열성을 보였다. 전경련 중진회원사 대표들로 구성된 경제 사절단이 수시로 해외로 나가 상대국 경제단체와 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를 개최했고, 이를 계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는 방문국 기업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와 사업기회를 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해외에서도 특히 선진국의 경제단체들이 한국에서 합동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답방 형태로 경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현대 울샨 조선소./조선일보DB
현대 울샨 조선소./조선일보DB
전경련은 어떤 때는 한 달에도 몇차례씩 이러한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 공업화 수준은 아직도 가발과 저가 섬유제품 등 저임금에 의존한 경공업제품 수출이 주를 이루고 있는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무장관과 무역 관련 정부 기관 책임자들, 그리고 경제계 대표들이 참석하는 정례 수출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적극성을 보이는 시기였다. “수출입국”이라고 쓴 박 대통령의 친필 휘호 영인본 액자는 주요 관련 정부 부처는 물론 경제단체 뿐만 아니라 웬만한 무역업체 사무실에는 반드시 걸려있는 비품이었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국제 수출시장에서 한국 수출품에 대한 기술이나 품질 수준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낮은 수준이었다. 한국은 세계무역기구가 기술수준이 낮은 못사는 나라들의 경공업 제품들에 대하여 선진국 수출이 용이하도록 별도로 수입관세 인하를 해주는 제도인 GSP의 수혜국이었다. 기술도입과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하여 고부가가치 수출산업으로의 구조 개선이 절실한 시기였다. 한편으로 특유의 근면성과 새로운 것을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한국 사람들의 탁월한 자질에 외국투자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외국 경제 사절단의 한국 방문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그들의 관심업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업체는 물론 세계시장을 향하여 발돋음 하고 있는 한국 산업계의 전체적인 환경 상황과 잠재력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시기 그들에게 보여 줘서 한국 사람의 저력에 대하여 신뢰를 심어주는데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이렇다 할 산업 현장이 별반 없는 형편이었다. 정 회장은 이러한 현실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것이 당시 국내는 물론 해외 매스컴에 연일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 울산 현대 조선소 대형 선박 건조 현장이었다.

거기에는 외국 경제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데 필요한 감동적이고 극적인 요소가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다. 일단 조선소 현장에 들어서면 대형 빌딩만한 까마득한 높이의 건조 중인 선체와, 거대한 크레인이 그 위를 물 흐르듯 오가며 장비와 선박 조립 부품들을 운반하는 위용은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압도했다. 하늘위로 높이 솟은 선체 외벽 밧줄에 매달린 패널에 몸을 의지하고 여기 저기 점처럼 보이는 작업자의 손에서 작열하는 눈부신 전기 용접 섬광, 주위 지상에서는 선체의 설계도면에 맞추어서 마치 옷감을 재단하듯 두꺼운 철판을 레이저 절단기로 오려내고 있는 작업자의 집중하는 모습, 햇볕에 검게 그을린 진지한 얼굴에 맺힌 땀방울과 걷어 부친 소매 아래로 불거진 근육, 그리고 땀 냄새…. 이러한 것들은 누가 보아도 분명 당시 한국 사람들이 가졌던 성취욕과 열정, 발전하는 장래를 희구하는 결의, 잠재력의 웅변적 상징들이었다.

“아니, 영국이나 북구의 조선 강국보다 더 현대적이고 거대한 규모인 이런 조선소가 한국에 있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현장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로부터 나오는 이구동성의 감탄사였다. 여기에 정 회장 특유의 적극성이 더해졌다.
“손님들이 조선소를 방문할 때 회사 주인이 직접 손님들을 안내 하는 것이 성의를 보이는 것이고 또한 예의야.”
세상에서 제일 바쁜 ‘주인’ 정 회장은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제치고 외국 경제 사절단이 현대 조선소를 방문할 때 마다 현장에 내려가 직접 손님들을 맞이하여 안내하고 조선소 안에 설치된 영빈관에서 그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수시로 외국 사절단들을 현지 수행하고 정 회장 통역을 해야 했던 필자는 70년대 현대조선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는 가장 많이 현대조선 산업 시찰을 한 사람이 되기도 했다. 한국의 잠재력을 세계 경제계 인사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쏟은 정주영 회장의 열정은 자신이 현대 조선소 창업자라는 입장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당시 한국 민간 경제계를 대표하는 전경련 회장이라는 사명감도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김재익 전 경제기획원 운영국장(왼쪽)과 오원철 전 경제수석./조선일보DB
김재익 전 경제기획원 운영국장(왼쪽)과 오원철 전 경제수석./조선일보DB
방한하는 외국 경제 사절단 일정에 반드시 포함하도록 정 회장이 지시한 부분이 또 있었다. 그것은 당시 경제기획원 운영국장을 맡고 있던 고 김재익 박사에게 한국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브리핑을 듣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세종로 미 대사관 옆 건물에 있던 경제기획원의 회의실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차분한 어조에 유창한 영어와 해박하고 논리 정연한 그의 브리핑은 외국인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브리핑은 이들에게 한국의 의욕에 찬 경제개발 계획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심어주는데 빈틈이 없어보였다.

그 다음 기계공업이나 중화학공업 분야 관련 인사들에게는 중화학 공업 담당 청와대 경제수석과 중화학공업 추진기획단장을 겸하고 있는 오원철 씨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앙청 앞 정부 종합청사 기획단 회의실에서 외국 사절단들을 맞았다. 일본식 영어 발음이지만 열정에 넘치는 그의 브리핑은 외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현대조선, 자동차, 중동건설 성공사례를 앞세워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그의 열정적 활동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민간 경제계를 대표하는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을 순방하며 한국경제에 대한 신뢰를 그들에게 심어 주었다. 한국이 수입보다 수출을 훨씬 더 많이 하는 무역 역조로 불만에 차서 한국에게 시장 개방 확대와 무역 보복 압력을 가해 오는 미국과 캐나다 같은 나라에 대하여는 정부가 못하는 부분을 민간 경제계 대표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대응 논리를 표가며 방어노력에 앞장 서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이 시기에 명실 공히 한국의 ‘민간경제외교 수장’으로 눈부신 활동을 하며 한국경제 발전에 또 다른 차원의 일익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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