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17 04:54
자유를 향한 탈출

국군 헌병대 1개 중대가 경비를 위해 파견 나가 있었지만 부평 제10포로수용소는 여러 미군부대가 주둔한 거대한 기지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여타 수용소와 달리 미군의 감시를 이중, 삼중으로 받던 상태였다. 그래서 원용덕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파견나간 밀사가 미군의 지휘를 받던 국군 경비병원들을 사전에 접촉할 수조차 없었고 당연히 반공포로들에게도 거사와 관련한 지침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거제도수용소를 제외한 전국의 8개 수용소에서 동시에 석방이 전격 단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부평의 제10수용소는 이때 함께 행동하지 못하였다. 부평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은 그날 정오 확성기 뉴스를 통해서 비로소 거사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다. 포로들의 외부작업이 전면 금지되었을 만큼 미군의 감시망이 즉각 강화되었지만 거사 소식은 부평수용소의 포로들을 흥분시켰다.
감시 초소에서 바라 본 부평수용소의 전경과 포로들의 모습. 당시 수용된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다가 비명횡사하였다. 철창 밖에 국군에서 파견 나온 경비병이 있었지만 미군기지 한가운데 위치하다보니 탈출 당시에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사진=라이프
감시 초소에서 바라 본 부평수용소의 전경과 포로들의 모습. 당시 수용된 많은 반공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다가 비명횡사하였다. 철창 밖에 국군에서 파견 나온 경비병이 있었지만 미군기지 한가운데 위치하다보니 탈출 당시에 충분한 도움을 줄 수 없었다./사진=라이프
즉시 간부회의를 소집한 반공포로들은 그날 저녁 9시에 탈출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러한 계획을 국군 경비병들에게 통보하였다. 그들에게 자유를 향한 열망은 그만큼 중요하였던 것이었다. 미군의 감시망이 엄중하여 애당초 부평수용소 포로들의 탈출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포기하였던 헌병총사령부는 반공포로들의 굳은 의지가 전해지자 김길수 대령을 즉시 파견하여 외부에서 적극 지원하기로 조치하였다.

사전에 철책을 국군 경비대가 비밀리에 잘라놓고 인근 마을에는 탈출한 반공포로를 적극 보호해 줄 것을 고지하였다. 그러나 조짐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미군은 저녁이 되자 국군 병력을 전원 철수시켜 초소 경비를 미군으로 전면 대체하고 외곽은 당시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를 동원하여 2중으로 감시하였다. 그러한 긴장 된 상황 하에서 마침내 밤 9시 대대적인 탈출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포로들이 조를 짜서 일거에 철망을 뚫고 튀어나오자 철조망을 담당하던 미군 경비병들은 겁을 먹고 도망갔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헬리콥터 비행장에서 강력한 서치라이트를 수용소 방향으로 비침과 동시에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들이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를 응사하며 포로들의 탈출을 저지하였다. 바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들이 자유를 바로 코앞에 두고 희생당한 것이다.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격려하기 위한 환영대회 장소에 설치된 조형물. 아쉽게도 탈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사상 당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평의 제10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포로들이었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탈출한 반공포로들을 격려하기 위한 환영대회 장소에 설치된 조형물. 아쉽게도 탈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사상 당하였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평의 제10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포로들이었다./사진=정부기록사진집
잊혀진 역사의 현장

부평수용소에서 발생한 사망자 47명과 부상자 60명은 탈출에 나선 인원의 10퍼센트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으로 이점은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이다. 이때는 이미 우리 정부가 대통령 책임 하에 반공포로의 처리에 관한 정책을 확고히 공표한 상태였고, 유엔군사령부도 비록 불만이 많았지만 탈출한 포로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검거하지는 않겠다고 방침을 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비극의 현장이었던 부평수용소 터는 이후 미군부대와 국군부대를 거치며 군사 시설로 계속 이용되어오다가 1998년 인천시에 반환되어 2002년 부영공원으로 재탄생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현재는 커다란 운동장들과 수목들이 인근 주민들에게 훌륭한 여가 시설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곳이 비극적인 역사의 장소임을 표시하여 주는 표식이 없고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다.
부영공원은 일제가 10년, 미군이 20년, 국군이 20년을 사용한 후 반환되어 인천시에서 사용한지도 15년이 넘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정작 이를 알리는 흔적은 없다.
부영공원은 일제가 10년, 미군이 20년, 국군이 20년을 사용한 후 반환되어 인천시에서 사용한지도 15년이 넘었다. 이러한 역사에서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정작 이를 알리는 흔적은 없다.
지난 2013년 8월 26일, 부영공원에서 기형 맹꽁이가 출현 했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는데,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발생한 토양 오염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설령 오염 때문이라도 일제가 기지로 만들어 10년을 사용하고 이후 미군이 20년, 국군이 20년 그리고 인천시에 반환 되어 공원으로 사용 된지가 15년이다 보니 책임 소재를 가리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어쨌든 기형 맹꽁이의 등장은 환경 문제에 많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인천시와 국방부가 협조하여 공원의 토양 정화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지역 환경 단체의 도움으로 맹꽁이의 서식지 이전도 실시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바로 그곳이 그처럼 수많은 반공포로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장소라는 것은 망각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이슈에 가려져 부평 제10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비극은 그동안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친공포로들의 해방구 노릇을 하며 비극적인 이념갈등의 현장으로도 기록된 거제도수용소는 불행했던 시절을 반추하는 사적지가 되었지만 막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탈출한 반공포로들이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갔던 부평수용소에 대한 역사는 완벽하게 잊혀져 버렸다. 아쉬울 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당장의 환경문제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역사를 잊고 지내서는 곤란하다.(끝)
지난해 8월 부영공원에서 발견된 기형 맹꽁이의 모습. 많은 이들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바로 같은 곳에서 6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안내문은 없다./사진=인천녹색연합
지난해 8월 부영공원에서 발견된 기형 맹꽁이의 모습. 많은 이들에게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지만 바로 같은 곳에서 6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이나 안내문은 없다./사진=인천녹색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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