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19 10:33

조선 현종 왕비의 경쟁력(下)

☜ 상편에서 계속

4. 명성왕후의 죽음으로 장희빈이 득세

현종의 외아들 19대 숙종은 환국정치와 장희빈으로 유명하다. 숙종은 1674년 13세에 왕위에 올라 46년간 재위에 있다가 59세에 사망했다. 서인 노론 한당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김 육의 손녀딸 명성왕후는 자신의 외아들인 왕이 왕보다 나이 많은 중인 출신의 궁인 장옥정에게 푹 빠져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장옥정 집안은 인동 장씨로 친가와 외가 모두 부자 역관으로 유명한 중인 집안이었는데 나이 어려 궁에 들어가 조대비 전의 궁녀로 있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왕보다 2살이 많으나 워낙 미색과 매력이 뛰어나 연하의 미남 청년 왕 숙종을 완전히 품안에 넣었다.

그리고 장옥정의 친정이 명성왕후 친정과 반대당인 남인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명성왕후의 마음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1680년 대비의 권한으로 장옥정이 천하다고 궁에서 쫒아냈다. 장옥정을 쫒아낸 후 3년이 지난 1683년 추운 1월 사랑하는 외아들 숙종이 괴질 병에 걸렸다. 무당을 좋아한 명성왕후는 무당이 “왕의 모친이 얇은 홑치마만을 입고 직접 물벌을 맞아야 왕의 병이 쾌차 한다”고 하여 무당의 말대로 엄동설한에 홑치마만을 입고 온 몸에 찬 물벼락을 맞았다. 왕의 병은 나았는데 그 때문에 명성왕후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그해 1월21일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명성왕후의 죽음은 25살 장옥정의 행운을 불러왔다.
장희빈
장희빈

인현왕후 민씨
인현왕후 민씨
5. 장희빈의 왕자 출산은 송시열에게 죽음의 직격탄

명성왕후 사후 장옥정은 즉시 다시 궁으로 들어갔다. 장옥정보다 무려 8살이나 어린 인현왕후는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없었는지 숙종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이 많은 장옥정만 찾았다. 드디어 장옥정은 1688년 30세란 늦은 나이에 왕자를 출산하고 승승장구하여 희빈에 올랐다. 숙종은 첫 왕자를 보자 너무 기뻐 후궁의 아들임에도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남인의 사람인 장옥정의 아들이 세자가 되면 남인의 적대당인 노론은 큰 변이 아닐 수가 없었다.

1689년 1월 노론 영수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현재의 중전(노론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이 23세라 아직 젊어 출산 능력이 있다고 하며 극력 반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송시열에게 앙심을 품어 온 숙종은 이번이 송시열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남인들이 이에 적극 가세했다. 왕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송시열을 다시 국문하기 위해 한양으로 소환했다.

1689년 6월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는 도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남인들의 말에 의하면 송시열이 사약을 먹으려 하지 않아 군졸들이 강제로 입을 벌려 입속으로 사약을 넣어 먹여 죽였다고 하면서 송시열을 비굴한 인간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노론들은 너무 의연하게 사약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 송시열의 나이는 83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 번이나 기록되어 있고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도 문묘에 배향되고 죽은 후에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의리와 주자학을 위해 순교한 것으로 승화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인 노론은 그의 사상과 주장을 계속 받들어 가다가 정조가 죽은 후 권력투쟁에서 최후 승리자가 되어 조선말 100여 년간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다가 일본에 나라를 팔았다.

6. 세월호 참사, 노론적 당파의식 버리고 이순신 장군 유비무환정신으로 극복해야

명성왕후 김씨의 적대적 감정이 그녀의 아들 숙종으로 하여금 송시열을 죽게 하였으나 송시열의 추종자들은 건재하였다. 23대 순조가 11세에 즉위한 1800년부터 부터 1910년 한일합병 때까지 송시열의 추종자들인 외척 안동김씨와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여흥 민씨 등 노론이 장악한 조선 정부의 극심한 부정과 부패로 조선 천지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채워졌다. 조선말 세상이 변하여 국가의 위기가 코앞에 와 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 당파 노론의 세력유지에만 급급했다. 그들은 각종 부정과 뇌물을 즐기다 일본으로부터 귀족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 외척 안동 김씨는 16세기부터 서울 장동에 살아서 장동 김씨라고도 한다.

이번 세월호의 참사도 나와 내 당파만 잘 되면 좋다는 노론적 사고에서 발생한 것이다. 좀 살 만하다고 우리는 조일전쟁(임진왜란) 전의 조정과 조선말의 노론처럼 위기불감증에 빠져있고 전쟁이 나도 나와 내편만 생존할 궁리만 모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순신 장군은 420년 전 홀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세월호 사건 장소 주변 진도 일대와 남해안의 조류를 샅샅이 조사했다. 장군은 1597년 맹골수로 위 진도와 해남 사이의 명량(울돌목)에서 급속한 조류를 이용해 10 배 넘는 전선과 병력의 일본 수군을 대파했다.

지금 한국의 해양시스템 운영은 420년 전의 이순신 장군의 수군시스템보다 훨씬 못한 것 같다. 이제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본받아 어떠한 위기에도 온 국민이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교육 프로그램을 아래와 같이 만들어 유치원 아동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서둘러 실시해야 한다.
현종 왕비, 아들 숙종이 장희빈에게 푹 빠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