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13 05:30

한국 조선업에 신천지를 개척하다(上)

게딱지 같은 어촌 몇 채가 보이는 조선소 부지 모래사장 사진과 어설픈 설계도면을 보고 정 회장에게 대형 유조선 2척을 주문하여 현대조선의 활로를 열어준 그리스의 세계적 선주 리바노스. 그에 대하여 정 회장은 “그때 나처럼 미쳤던 또 한사람”이라며 후일담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세계 선주들에게 현대조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그만큼 현대조선 초기의 수주 활동에는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수주 팀은 배 한척을 수주 받기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사력을 다했다.

수주 상담이 성공적으로 계약 단계에 이른 시점에서는 조선소 사장과 현장 임원들은 성취감에 들떠있게 마련이다.
“계약서 최종서명은 인사도 드릴 겸 직접 정 회장님을 뵙고 합시다.”
선주 대표가 제안을 했다. 계약 조건들이 이미 다 합의가 되어있는 상태여서 서명만 하는 단계이고, 또 정 회장 앞에서 그동안의 수고에 대해서 칭찬을 들을 수도 있는 기회이니 사장과 담당 임원들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회장님 그 동안 만족할만한 협상과정을 거쳐 계약을 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선주 대표가 말을 꺼냈다. 조선소 간부들은 득의양양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달을 거쳐 협상내용을 가지고 줄다리기를 한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추가 부탁이라고 해야 별게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조선소 간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얘기를 듣고 있었다.
“본사에서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가 확보해야할 선복량이 앞당겨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합의한 계약서상의 배 인도시기를 3개월 정도만 앞당기는 것으로 수정해서 계약해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1975년 현대조선소의 모습/조선일보DB
1975년 현대조선소의 모습/조선일보DB

선주 대표의 말에 일순간 조선소 간부들은 경악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공정관리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초기인데다 이미 건조가 진행되고 있는 다른 배에 안배해야할 작업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새로 수주한 배의 건조에 필요한 새로운 중장비와 기자재의 확보 일정도 빠듯해서 사실상 기존 계약상의 인도 기일도 이미 벅찬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소 간부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정 회장과 선주대표와의 대화를 자르고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정 회장을 바라보며 절대 수락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눈길만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이런 분위기와 아랑곳 없이 몇 초의 주저함도 없는 정 회장의 즉답이 나왔다. 선주 대표들의 표정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조선소 간부들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계약서 서명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선주 대표들을 보낸 뒤 정 회장과 조선소 간부들과 후속 회의가 열렸다.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 납기를 맞추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그야말로 걱정으로 죽을 상이 된 현장책임 임원이 용기를 내서 읍소를 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정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보통은 이런 경우 날벼락이 떨어질 터인데 사정을 듣고자하는 정 회장의 태도에 그는 용기를 얻었다.

“회장님 원래의 인도 계획도 그들의 요구로 대단히 빠듯하게 잡은 것입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다른 배의 작업량도 있지만 그보다도 큰 문제는 이번 배를 건조하는 공정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용량보다 훨씬 큰 대형 운반 크레인을 수입 발주해야 하는데 크레인 회사 사정으로 볼 때 오늘 발주해도 제때 도착 시키는 것이….”

그 임원이 말을 계속 이으려 할 때였다.

“이봐, 해봤어?”

이윽고 정 회장이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질문 아닌 질책의 말을 던졌다. 그 다음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불가능해 보일만큼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아직 모든 방안을 강구하여 가능하도록 해본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정 회장의 의중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보였던 정 회장의 모습은 그가 특히 어려운 일을 놓고 간부들과 회의를 할 때 보고하는 내용이 맘에 안 들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 보이는 특유의 제스처와 표현이다.

먼저 그는 상대에 대한 호칭부터 “김사장” “이전무” “박 상무” 등 성과 직급을 생략하고 “이봐”로 대신한다. 그다음 얼굴 위아래를 훑어보며 질책을 한다. 정 회장의 이런 호칭과 표정이 나오면 먼저 긴장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를 오래 보좌한 현대그룹사의 간부들 사이에는 하나의 요령이 되어 있었다.


☞ 하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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