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12 13:59

기마유목민족 돌궐과 한민족의 관계(上)

1. 유라시아 스텝지역에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한 기마유목민「돌궐」, 현대의「터키」로 이어지다.

돌궐족은 유라시아 스텝지역 역사의 핵심인 기마유목민족이다. 튀르크족으로도 불리는 돌궐은 오늘날의 터키를 건국하기 전 이미 수천년에 걸쳐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아프리카 등지에 10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튀르크족은 알타이산맥에서 기원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BC 20세기경 등장한 흉노는 튀르크족과 몽골족이 혼재된 유목민 집단이어서 흉노가 튀르크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이 튀르크가 아시아 동부에서 서진하면서 유라시아 전체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최초의 튀르크족 국가는 BC 3세기의「흉노(아시아훈제국)」다. 흉노가 분열되면서 서진한 세력은「훈(유럽훈제국)」을 건국했고, 이어 질풍노도와 같이 유럽에 엄습하여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튀르크국가가「돌궐(괵튀르크)」로, 튀르크라는 이름을 쓴 최초국가다. 돌궐은 745년 멸망하고, 알타이산맥에 살던 또다른 튀르크계「위구르」가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이슬람화 하게 되고 이후 이슬람 튀르크 국가들이 중앙아시아 등지에 계속 세워지게 된다.

11세기 들어 실크로드를 따라 서진한 튀르크 일파가「셀주크튀르크」를 건국했으며(1037), 만지케르트전투(1071) 승리로 비잔틴제국을 제압하고 오늘날 터키 땅인 소아시아 반도까지 차지해「룸셀주크」라는 나라를 세웠다. 몽골의 공격으로 셀주크제국이 멸망한 후 룸셀주크도 약화되면서 오스만공국이 세워졌고 이후「오스만튀르크제국」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슐레이만 1세때는 제국의 전성기로 발칸반도, 헝가리, 소아시아, 흑해 일대, 이집트 및 아프리카 북부 등을 차지하여 지중해를 장악했으며, 최대 영토는 560만㎢에 달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이 제국도 그러나 레판토해전의 패배(1571), 2차 빈 포위 실패(1683) 등으로 영토를 잃어가다 19세기에는 발칸반도, 이집트, 아랍지역까지 상실하면서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후 1908년 청년터키혁명을 거쳐 1923년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에 의해 오늘날의 터키공화국이 건설됐다. 이렇게 돌궐은 552년 건국 이래 몽골고원에서 유럽지역까지 광대한 스텝지역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1·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튀르크국가를 건설하는 등 유라시아스텝지역의 역사를 계속해 써 내려 갔다. 오늘날 터키의 교과서는 이들 튀르크국가를 모두 터키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튀르크인들이 사는 세계지도(위)와 6.25 참전기사(아래)/자료=터키교과서
튀르크인들이 사는 세계지도(위)와 6.25 참전기사(아래)/자료=터키교과서
2. 기마유목민 최초로 문자기록을 남기고 동서교역의 중심 실크로드를 경영한 초원제국 돌궐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은 약 2,500년에 걸쳐 세계사의 중심무대에서 활약했다. 돌궐도 바로 이 기마유목민족이다. 기마유목민족들은 정주민족과는 달리 오랜기간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했고, 그 결과 기록문화가 취약하다. 그래서 이들에 관한 오랜 기록은 정주민족의 시각에서 보고 쓰여진 것들 뿐이다. 「스키타이」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그 존재를 처음 기록했고, 「흉노」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했다. 이들이 본 스텝지역의 기마유목민족은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하며, 더 나아가 비문명과 비문화의 대명사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유라시아스텝민족의 역사가 왜곡되고 세계사에서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한 원인이 아닐까.

그런데 돌궐은 예외였다. 그들은 유라시아 스텝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를 가졌고 기록을 남겼다. 몽골북부 오르혼(Orkon) 강주변에서 AD 720-735년경 세워진 돌궐어 비석이 발견됐다. 이 비석은 후돌궐지도자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것으로, 돌궐제국은 물론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의 잊혀진 역사를 다시 꺼내어 새롭게 보게 만드는 기념비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비석의 비문에는 돌궐제국의 건국, 역대 카간들의 업적, 주변국과의 관계, 군사 및 사회제도, 법과 관습 등 스텝지역 기마유목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17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에서 포로가 된 스웨덴 장교 ‘슈트라흐렌베르그’가 포로 생활 중에 발견하여 1730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졌는데, 19세기말에 본격적 연구가 진행되어 덴마크 학자 ‘톰센(V.Thomsen)’이 판독했다.

이 비문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돌궐어 문헌이다. 그런데 이 비문 중 퀼테킨비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바로 고구려에 대한 것으로, 572년 ‘무한카간’이 사망하자 고구려가 사절을 파견했다는 기록이다. 이 비문 동쪽면 40줄 중 네 번째 줄에는 ‘동쪽의 해뜨는 곳으로부터 뷔클리(bükli<bök(kö)li<mäkkoli(맥코리)로도 읽는다)…에서 문상객이 와서 애도했다’고 적혀있다. ‘뷔클리’는 ‘맥족고구려’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진출하면서 고구려의 존재를 ‘코리’라는 이름으로 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돌궐과 교류하던 동로마 문헌에 고구려가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이후 10세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 이름 했으며, 고려가 남송 및 아랍세계와 교역하면서‘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됐다. 따라서 코리아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는 민족구성과 언어, 관습, 문화 등은 물론 이름까지 명백한 한민족고대국가로 중국이 시비할 사안이 아니다.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퀼테킨(왼쪽)과 퀼테킨 비문/사진=카자흐스탄 문화정보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돌궐은 중국과 비잔틴제국간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된다. 실크로드에서는 소그드인이 동서교역을 맡고 있었고, 돌궐의 보호 아래 교역이 이루어졌다. 돌궐은 교역확대를 위해 비잔틴제국과 직접 무역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계기로 돌궐과 비잔틴 간에 우호관계가 맺어져 페르시아를 동·서에서 견제하는 구도가 됐다. 이는 중국의 수·당에 대항하는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관계를 갖게 되는 상황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본고 11편 참조). 고구려를 이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도 돌궐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코리아' 명칭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근거
/하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