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14 11:00 | 수정 : 2014.05.14 14:20

현종 왕비의 경쟁력(上)

1. 명성왕후 김씨는 송시열과 적대적인 영의정 김육의 손녀딸

명성왕후 김씨는 조선 18대 현종의 정비로 청풍 김씨 김 육의 손녀딸이다. 그녀의 조부 김 육은 황 희, 유성룡과 더불어 조선의 최고 명신이다. 16대 인조 때인 1638년 충청관찰사 재직 중 대동법의 건의는 물론 수차(水車)와 수레를 만들어 농민들에게 보급해 당시 전후 농토복구에 기여를 많이 했다. 그는 대동법을 충청도에 실시해 성공시키고 주전 화폐유통도 활성화시켜 전후 국가 경제 발전에도 큰 공로를 세웠다.

김 육은 도승지,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51년부터 1658년 사이에 영의정을 두 번이나 역임한 당대 최고 거물 정치인이었다. 김 육은 서인이었지만, 학풍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퇴계 이 황의 학설도 일부 수용했다. 융통성 있는 그는 서인의 성리학과 남인의 중상주의 실학을 연결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광해군 때 북인 정인홍과 대립하다가 성균관에서 퇴교 당한 후 고향 가평 농촌에서 약 10년간 지내면서 농민들의 고달프고 가난한 삶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그의 농촌 체험이 대동법의 시행과 수차의 보급으로 이어졌고 정치적인 거물임에도 그는 관직 생활 내내 농민경제 향상에 주력하였다. 그의 대동법 실시에 양반 지주 귀족들이 극렬 저항했고 보수 주자학을 주장하던 김장생의 아들인 김 집과 그의 제자 송시열 일파의 반대와 비난은 엄청났다. 김 집은 송시열, 송준길, 김상헌 등을 결집하여 김 육을 집중 공격하였다. 김 육은 농업은 물론 상공업도 진흥이 되어야 나라의 살림이 향상된다고 하여 주전 화폐 십전통보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이 역시 김 집과 송시열 일당이 김 육이 상인들한테 뇌물을 받아먹고 그런 짓을 한다고 맹공격을 하여 김 집과 송시열 일당(산당)은 김 육 지지당(한당)과 완전한 적이 되었다. 따라서 김 집과 송시열은 김 육의 아들 즉 명성왕후의 부친 김우명 형제와도 적대관계가 되었고 명성왕후 김씨도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송시열과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명성왕후의 친정 집안과 송시열과의 적대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후궁 한명도 두지 않게 만든 조선 현종 왕비의 비결


2. 명성왕후 원자 출산은 시아버지 상중 동침 결과라고 송시열 축하 안 해

송시열은 인조에서 숙종까지의 네 임금으로부터 무려 167회의 벼슬 제의를 받았으나 이에 응한 것은 불과 37번 이었다. 우의정과 좌의정에 세 번이나 제수되었으나 총 근무한 날짜는 불과 49일이었다. 그는 왕의 벼슬 제의를 받으면 거부하거나 설사 조정에 나가도 일주일도 근무를 하지 않은 채 왕을 비방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그 때마다 유림에서 그의 정치적인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날았다. 지금 자유민주주의 한국에서도 총리, 장관 등의 고위 공직자들 중 대통령이 영 마음에 안 들어 사직한다고 발표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전제 군주 왕조 국가에서 그러한 대담한 행동을 하는 그의 기개와 정치적 수완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재야에서 얼마든지 조정의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그는 임금도 두렵지 않았고 조정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18대 현종의 정비인 명성왕후 김씨는 현종 2년 1661년 원자(후에 숙종)를 출산했다. 왕비가 원자를 출산했으니 국가의 최대 경사였다. 조정 모든 대소 신료들이 축하인사에 참례했는데 배짱 대단한 송시열 혼자만 참례하지 않았다. 송시열 반대파로부터 즉각 다음과 같은 비난이 나왔다. 왕비 시아버지(효종) 상중의 출산은 왕과 왕비가 상중에 동침을 한 결과이며 그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송시열이 판단해서 원자 출산 축하에 참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송시열은 사실이 아니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현종과 명성왕후는 송시열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원자(후에 숙종)는 성장하면서 모후인 명성왕후로부터 송시열의 불경행위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성격이 강한 원자는 왕이 되면 “내가 송시열 이놈을 반드시 죽일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 현종이 후궁을 안 둘 정도로 명성왕후는 매력을 융합 창조

현종은 조선의 27명의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았다. 현종은 세자 때부터 병약해서 재위 15년 동안 온양 온천에 치료차 자주 갔다. 현종은 오고 가는 도중 꼭 군사훈련을 참관하였다. 왕의 온천 여행 일정을 알 수 없는 군대는 왕의 참관에 대비해 항상 훈련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로 현종은 과단성이 있고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한 왕이었다. 현종이 몸이 약해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얘기와 명성왕후의 성격이 사나와 왕이 눌려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둘 다 아닌 것 같다. 조선의 왕들 중 많은 왕들이 병약했으나 모두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왕비가 성격이 사나와 후궁을 두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현종은 병약하지만 왕비가 하라는 대로 하는 유약한 왕은 아니었다. 대궐 안에서는 왕만이 남자이고 왕은 많은 미인 궁녀들의 유일무이한 남자 고객이다. 이 고객만 잡으면 궁녀 신분을 벗어나고 품계 높은 후궁이 되어 인생길이 달라졌다. 지능이 높은 명성왕후는 이 고객을 다른 젊은 미녀 경쟁자들에게 한 번도 빼앗기지 않고 독점한 것이다.

그녀는 명문가 여인답게 총명하기도 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명성왕후 백부 김좌명은 당시에 가장 인물이 빼어난 조정 대신이었다고 하니 그녀도 미인이었을 것이다. 총명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녀는 남편과의 야밤 행사에도 체면 차리며 숨소리까지 죽이는 양반 여인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명성왕후는 아래 그림과 같이 품위와 관능미가 함께 어우러지는 성적 매력을 융합 창조하여 젊은 미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병약한 왕을 사로잡아 15년간 4명의 자녀들을 출산했다.

후궁 한명도 두지 않게 만든 조선 현종 왕비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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