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5.06 17:49 | 수정 : 2014.05.07 08:48

"내 생애에 성공 못해도 디딤돌 놓으면 후회 없어"

“정 회장님, 이미 여러 계제에 말씀드렸지만 오늘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동차 독자개발을 포기하십시오.”
1977년 5월 어느 날 오후 미국대사관에서 예약해 둔 조선호텔 스위트 룸에서 정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 리처드 스나이더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던진 첫 마디였다. 통역을 위해 유일하게 배석했던 나는 순간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당시 언론, 그리고 전경련 중진들과의 회합에서 정 회장이 밝힌 자동차 독자개발에 대한 집념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던 터에 스나이더 대사의 발언이 주는 충격이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었다.
스나이더 전 주한 미대사/사진=국가기록원
스나이더 전 주한 미대사/사진=국가기록원
그는 말을 이었다.
“정 회장님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포니가 토리노 자동차 쇼에서 호평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자동차 사업을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나의 자동차 회사는 최소 50만대 규모의 생산량이 뒷받침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외국산 자동차의 조립업체 모두를 합해도 채 30만대가 안됩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불과 몇 천 달러밖에 안 되는 마당에서 내수 시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수출시장을 생각한다고 하시는데 다른 공산품과 달리 자동차 수출이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환경, 안전 규제 등 얼마나 그 장벽이 높은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 자동차를 만들려면 수 만개의 부품들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의 공업기술 수준으로는 그 기반이 너무 취약합니다. 거기다 100년 가까이 기술과 명성을 축적한 기라성 같은 선진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정 회장은 별 표정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스나이더 대사는 말을 이었다.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독자개발을 포기하신다면 제가 모든 힘을 다 해서 정 회장님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포드든, 지엠이든, 크라이슬러든 선택하십시오. 현대가 원하는 유리한 조건대로 조립생산을 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뒤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차 내수 시장은 물론 일본을 제치고 동남아와 중국시장 진출도 가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중동 건설 시장에서도 현대 건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현대는 미국뿐 아니라 여러 해외사업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대사라는 직함이 원래 ‘특명전권대사’를 줄인 말로서 그 나라의 국가 수반을 대신해서 그 국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다. 스나이더 대사의 이러한 압박은 당시 금융과 무역 등 국제사회에 대한 미국의 막강한 영향력에 배경을 둔 것이었다. 중동 건설시장에서도 미국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스나이더 대사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자 당분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정 회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우선 내 사업을 염려해 주시는데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나도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사님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순간 스나이더 대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나라를 인체에 비교한다면 그 국토에 퍼져있는 도로는 인체의 혈관과 같은 것이고 자동차는 그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로가 발달하고 그 위를 자동차가 원활하게 다니면 피가 몸에서 원활하게 흐를 때 인체가 성장 발달하고 활력을 갖게 되듯이 그 나라의 경제가 생동력을 가지고 발달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 값싸게 공급하는 것은 인체에 좋은 피를 공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하는 소년기에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자동차 공업의 발전은 그만큼 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조만간 우리나라의 일인당 국민 소득도 5천불 수준이 되어 조금씩 내수도 살아날 것입니다. 쉽지는 않겠으나 열심히 노력하면 수출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자동차 산업은 기계, 전자, 철강, 화학 등 전 산업에 미치는 연관 효과나 기술 발전과 고용창출 효과가 대단히 큰 현대 산업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공업은 앞으로 한국이 선진 공업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분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사님께서 염려하는 대로 내가 건설사업을 해서 돈을 모두 쏟아붓고 실패한다 해도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우리 후대에 가서라도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성공하는데 필요한 디딤돌을 놓을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그것으로 보람을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담하나 힘이 실린 어조로 정 회장이 말을 맺었다.

통역이 끝났는데도 스나이더 대사는 말문을 열지 못하고 정 회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 회장의 말이 너무 결의에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 회장의 자동차 독자개발을 막고 한국을 미국 자동차산업의 조립기지화 하기 위한 초강대국 미국 정부와 막강한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스나이더 대사의 압력을 정 회장은 그렇게 받아넘겼다.
현대 포니 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신차를 살펴보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현대 포니 엑셀 신차 발표회장에서 신차를 살펴보고 있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당시 한국의 공산품 기술과 품질 수준이 단순한 공구류를 수출하는데도 바이어들이 품질이 못 미더워서 선적 전에 반드시 지정하는 대리인이 품질 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상례인 정도였다. 수출품은 아직도 저가 섬유제품과 경공업 제품이 주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자동차 독자개발을 고집하는 대신, 막강한 미국 자동차회사와 제휴하여 한국에 대규모 조립공장을 건설하여 부상하는 동남아와 중국시장을 겨냥하여 일본을 제치고 확대해 나가기를 바랐던 미국의 생각이 상식적으로는 타당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즈음 정 회장은 자신의 자동차 독자개발 포부와 관련하여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외국자동차 조립생산은 우리도 해봤지만 속빈 강정이야. 당장은 편하고 안전할지 모르지만 말이야. 차종도 저희들 맘대로 고르고 생산 장비도 저희들 것을 들여와야지, 중요한 부품들은 그들이 정하는 곳에서 그들이 정하는 값에 사와야지, 수출 시장 진출도 맘대로 못하지, 계약 조건에 따라 특허·라이센스비 등 이것저것 다 제하면 겨우 인건비 떨어지는 장사야. 장래성이 없어.”

정 회장이 꿈꾸었던 대로 한국의 자동차 독자개발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전문가들의 예측을 깨고 그후 기적같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의 자동차는 자동차 공업 종주국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 중국, 인도, 러시아, 중남미에 퍼져나가 명성을 떨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몇 년 안에 연산 1000만대 시대를 내다보고 있다. 최초 포니 개발 당시 일제 차와 포드 등 미국차 조립생산을 포함하여 한국의 다섯 군데 자동차회사 전체 생산량이 연산 30만대도 못 미쳤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꿈같은 일이다.

“자동차는 말이야 일종의 바퀴달린 국기야.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 팔면 이것들이 굴러다니면서 한국의 기술과 공업수준을 세계에 선전하고 다니는 것이 되거든.”

정 회장이 틈 있을 때마다 자동차공업의 보람을 표현한 말이다. 자동차공업이 한국의 공업 선진화와 경제발전에 미친 공헌, 그리고 전체적으로 한국 공산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 제고에 미친 영향은 그 가치를 가름하기 힘든 것이다. 되돌아볼 때 그의 무서운 예지력과 집념, 그리고 도전정신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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