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25 08:40 | 수정 : 2014.04.25 08:41

빈사 상태의 한국 경제를 구한 기상천외한 발상, 중동 건설 진출(上)

1974년 말 삼일로 빌딩 28층에 있던 전경련 회장실에서 긴급 회장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서 에너지 파동에 의해 심각해진 국내경제 상황에 대해 특별 면담을 마치고 나온 당시 김용완 전경련 회장이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소집한 회의였다.
"대통령께서도 현실이 너무 엄청나 정부로서도 당장 어떤 뚜렷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석유가가 5배 이상 뛰고 수출 길도 막혀 공장에 일거리가 없는 형편에서 기업이 수명을 연장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길은 당장 공장 문을 닫고 직원들을 출근시키지 않게 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인 줄 알지만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회장단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70 중반을 넘긴 나이에 고혈압으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김 회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일터를 폐쇄하여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되면 경제문제에 더하여 사회가 요동치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될 터이니 큰 기업들이 솔선하여 급여를 일부라도 지급하며 고용을 유지해 달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었나를 잘 말해주는 실화다. 통계에 따르면 당시 우리의 가용 외환 보유액은 3000만달러 정도로 바닥이 나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한 중소기업의 일 년 수출액 정도에 지나지 않는 액수다. 그간 아무리 우리 경제 규모가 커졌다 하더라도 요즘 우리의 외환 보유액이 35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거리를 다니는 자동차에 쓸 석유도, 발전소를 돌릴 석탄을 수입할 외화도 대책 없이 바닥이 난 셈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
"돈을 벌려면 세계 돈이 몰려 쌓이는 데로 가야돼!"
정주영 회장의 중동진출 발상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몇 차례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를 거듭한 중동 산유국들은 세계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OPEC(석유수출국기구)이라는 석유 수출국 카르텔을 결성하여 인정사정없이 석유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리고 있었다.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세계의 돈이 어쩔 수 없이 중동 산유국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모든 에너지 시스템이 석유소비 기반 위에 구축되어 있어서 석유가 없으면 순식간에 마비되게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정 회장의 출사표는 언듯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러나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발상이었다. 대체적으로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계를 포함하여 중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중동의 문화, 언어, 사회, 경제에 대하여 지식이나 경험이 일천하였고 이 분야 전문가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중동전이라는 사건으로 겨우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였다. 더구나 한국 기업이나 인력이 사막이라는 기후환경을 체험해본 경험은 전무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중동 건설시장은 과거 식민지 시절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을 통하여 관계를 돈독히 해온 영국을 비롯한 유럽,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세력으로 부상한 미국이 외교적 영향력과 앞선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인맥을 기반으로 탄탄한 기득권을 구축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사실 당시 엄청난 중동 건설 시장은 이들 선진국들의 내로라하는 세계적 토목, 건설, 엔지니어링, 컨설팅회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독무대였다.

한편 한국의 건설 회사들의 해외 공사 경험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해외 공사 입찰 자격을 따내는 것도 문제지만 입찰을 딴다 해도 국제 기준에 맞추어 입찰 서류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우리는 국제 기준에 맞게 설계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거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설 분야 전문가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죽기 살기로 부딪치고 밤낮 없이 배워가며 해냈지요."
중동 건설 진출 초기에 참여했던 한 건설 기술자의 술회다. 이렇듯 현실적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정 회장의 중동 건설 진출 계획은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반대와 비웃음에 직면하게 된다.
"정회장이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박대통령이 밀어준 데다 운이 좋아 성공하더니 보이는 것이 없나봐, 중동이 어디라고."
"정회장이 뭘 모르기 때문에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현대건설이 망하는 건 둘째 치고 한국이 망신하게 되는 게 문제야." 그런데 이러한 반대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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