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15 14:47 | 수정 : 2014.04.16 08:02

"길이 없으면 만들어라" 경부고속도로 건설(下)

상편에서 계속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직면한 도전은 여러 면에서 너무나 엄청난 것들이었다. 최우방국인 미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거센 반대에 부닥쳤다. 관계와 경제 부처는 내놓고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내 비치지는 못했지만 같은 입장이었다. 학계 등 전문가 집단도 반대했다. 야당은 물론, 당시 집권 세력의 주축인 5·16 혁명 주체들로 구성된 공화당 핵심 그룹에서도 반대의견이 거셌다. 우선 극도로 궁핍한 나라살림에 막대한 소요재원 조달 방안이 없다. 또 미국이 반대하는 마당에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국가 경제가 파국에 이르게 되면 앞으로 경제개발 계획의 성패는 차치하고라도 민생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결과 민심이 이반되면 혁명 자체가 실패할 수 있는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너무나도 확고한 의지와 그의 개성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도 먼저 나서서 박 대통령에게 반대 의사를 전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때 이들이 생각해낸 인물이 있었다. 공화당 당의장과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씨이다. 그는 박 대통령이 대구사범 시절 그의 은사였다. 박 대통령은 그가 통치에 대해서 부정적인 조언를 해도 경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를 앞세우고 중진 몇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 철회를 위해 청와대로 대통령 설득 방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통의 의지는 요지부동이었다.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년 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DB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년 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DB
그러나 현실은 박 대통령에게 큰 난제들을 가지고 압박해 왔다. 초기 예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파독 간호사와 광부의 피땀어린 급여를 담보로 독일로부터 겨우 얻어온 차관,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받는 파월 장병의 피와 생명을 건 급여, 그리고 일부 시장에서 현금화한 PL 480 대금 등 성격으로 보아 참으로 가슴 저리게 눈물겨운 재원을 겨우 마련했다. 그러나 그 못지 않은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국내에 어느 누구도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이 있는 회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예산을 세울지, 설계는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필요한 기술과 장비를 확보할 지 막연한 상태였다.

이때 떠오른 것이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추진되기 몇해 전인 1965년 현대건설이 처음으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의 짧은 구간 공사를 해 봤기 때문이었다. 이 공사는 현대건설이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현지기후, 지질, 장비, 기술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대비도 없이 그야말로 멋모르고 뛰어들어 엄청난 적자를 보며 겨우 공사를 끝낸 뼈아픈 경험을 하게한 공사였다. 이런 배경에서 정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가 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스런 귀결이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소요 예산을 파악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우리 국토의 지형적 특성상 유별나게 산과 계곡이 많고 뚫어야 될 터널도 많은데 누구도 이런 조건에서 일반도로도 아닌 고속도로 예산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 현대가 태국서 해본 것도 규모나 지형 등 조건에서 너무 차이가 커서 크게 도움이 못되는 형편이었다. 박대통령은 넓게 의견을 구해 본다는 취지에서 정부 관련 기관에 예산 작업을 지시했다. 먼저 주무 부처인 건설부가 650억원, 수도권 도로 공사 경험이 있다는 서울시가 180억원, 예산 전문 부처인 재무부가 330억원, 군사도로 공사를 많이 해본 육군 공병감실이 440억원을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민간 업체인 현대건설이 280억원을 제시했다. 되돌아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하기로서니 고속도로라는 국가적인 대역사를 앞에 놓고 한국의 엘리트들이 모인 전문기관에서 낸 예산계획 이란 것이 30~40%가 아닌 400% 가까운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이는 경부고속도건설이라는 대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여건과 준비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미흡했는가를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일례였다.
1969년 12월 10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관련인사들이 테이프를 끊고 있다(위). 1970년 7월 7일 최종 공정을 끝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경부고속도로(아래)./조선일보DB
1969년 12월 10일 경부고속도로의 서울-대전 구간이 완공되어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관련인사들이 테이프를 끊고 있다(위). 1970년 7월 7일 최종 공정을 끝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경부고속도로(아래)./조선일보DB
이러한 어려움과 극적인 우여 곡절을 거친 경부 고속도로는 박 대통령과 정주영 회장의 혼신을 다 바친 열정과 집념, 그리고 처음 해보는 공사지만 사력을 다해 열심히 일한 현장근로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힘입어 정 회장이 제시한 280억 예산에 근접한 비용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세계고속도로 건설역사상 단위 거리 대비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그리고 수없는 난공사 구간에도 불구하고 최단 시일 내 완공이라는 대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경부 고속도로는 그 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에 역동적인 활력을 불어넣는 국가 대동맥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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