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14 13:00

'삼족오', 우리 민족 고유의 문양?<주천2>

주천 시내를 벗어나 자동차로 20여분을 달리자 정가갑촌(丁家閘村)에 이른다.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주천박물관이 번듯한 모습으로 마중한다. 박물관으로 들어서니 입구에 주천박물관의 특징을 요약해서 보여 주는 문구가 보인다. 바로 ‘사주지로(絲綢之路)’다. 사주지로는 실크로드의 중국식 표현이다. 서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실크로드가 거대한 지도에 표현되어 있다. 한 무제 시기 장건의 서역 탐방을 시작으로 시대별로 실크로드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해 놓았다. 그와 함께 실크로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과 생활상들을 그림, 사진 등을 곁들여 살펴볼 수 있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독특한 도자기가 눈에 띈다.
'三足烏'는 새발 달린 까마귀가 아니라 세 발 달린 '검은 새', '검다'는 의미는 태양의 흑점 상징 그 새는 봉황(鳳凰) 이어야
‘馬娘의 전설’, 당나라의 자유분방함

당나라 때 만든 이 도자기의 형상이 참으로 괴이하다. 아가씨가 말(馬)과 교접하는 모양이다. 당나라 때는 실크로드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더불어 당나라는 술과 시가 넘쳐나던 세계 최대의 국가였다. 그런 만큼 매일 밤 상상을 초월하는 밤 문화가 형성되었으리라. 이 도자기가 양반 댁 규수의 방에 있었는지, 기방(妓房)에 있었는지 아니면 도공이 자신의 공방에 두려고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성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를 취한 희대의 로맨스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을 테니, 신료들과 평민들도 술의 힘을 빌려 부끄럼 없이 밤거리를 활보하였으리라.
주천 박물관 모습
주천 박물관 모습
어느 국가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최고의 번영기 때는 자유분방한 문화를 누렸다. 자유 분방은 문란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반드시 위로부터 시작된다. 권력층이 누구보다 먼저 자유분방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함이 문란함으로 기우는 순간 국가도 기울기 시작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편안하고 분방하게 즐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번 맛을 들이면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국가 경영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에 궁전의 기둥은 썩어 문드러진다. 실크로드를 통해 맺어진 동서양의 대제국 당과 로마는, 자유 분방함이 문란함으로 이어짐으로써 결국 멸망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위진벽화묘에서 ‘삼족오’를 보다

간추린 실크로드의 역사와 유물을 관람하고 박물관 뒤편에 있는 벽화묘를 찾았다. 이 벽화묘는 5호16국 시대 후량(後凉)의 여광(呂光)이 통치(386∼399년)하던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데, ‘위진벽화묘(魏晉壁畵墓)’라고 부른다. 반듯하게 지어놓은 박물관과는 다르게 벽화묘는 황폐한 자갈밭에 자그마한 건물 두 개만이 서로 어색한 듯 좌우로 덩그러니 서 있다. 오른쪽 건물은 관리실 겸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고, 왼쪽의 작은 건물이 묘로 들어가는 입구다. 우중충한 날씨에 자갈밭 위로 몰아치는 바람이 매섭다. 고비사막의 모래바람이 하서주랑으로 몰아치니 그렇다. 6월이 코앞인데도 이 정도니 한 겨울의 바람은 어느 정도일까? 그야말로 천군만마의 병력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기세가 아닐까?
정가갑 묘실 입구
정가갑 묘실 입구

안내인이 입구를 열고 불을 켜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지하묘도가 비스듬히 보인다. 30여m를 내려가니 묘실이 나타난다. 묘실은 전실(前室)과 후실(後室)로 나뉘는데, 바닥은 구름모양이 그려진 전석(磚石)을 깔았다. 하늘 나라의 세상임을 표현한 것이다. 방형(方形)모양의 전실은 천장과 사방이 모두 벽화다. 피라미드 모양의 5단으로 된 천장 맨 위 중심에 연화조정(蓮花藻井)이 있고 단계별로 천상(天上), 인간(人間), 지하(地下)의 세계를 표현했다. 천상의 세계는 일월(日月), 동왕공(東王公), 서왕모(西王母), 백록(白鹿), 천마(天馬)를 네 면에 표현해 놓았다.

그런데 동왕공이 그려진 벽화에 삼족오(三足烏)가 함께 그려져 있다. 우리는 삼족오를 고구려의 상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삼족오는 하늘의 중심인 태양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로, 고대 동아시아 지역의 태양신을 믿는 민족들이 숭배하던 다리가 3개인 새다. 그런데 다리가 왜 세 개일까?
정가갑 위진벽화묘의 삼족오
정가갑 위진벽화묘의 삼족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동양사상에 근거해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높다. 즉 태양은 양(陽)이고 숫자 3도 양수(陽數)이므로, 태양에 사는 새의 발도 3개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천지인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족오에 대한 기록은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태양 가운데 까마귀가 있으니 세 발 달린 까마귀이다.(日中有烏謂三足烏也)”라는 기록이 있다.

고고학적 발굴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기원전 4000년경, 신석기시대 앙소문화(仰韶文化) 유적지의 토기에서 삼족오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삼족오에 대한 공동체적 믿음이 존재하였다는 증거다. 삼족오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이 한나라를 창건한 이후 본격적으로 전파된다. 한나라 때의 화상석이나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비단 등에 삼족오가 두루 보이는 것도 이때부터이기 때문이다.

삼족오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상징?

우리나라는 고구려 때 삼족오가 나타난다. 각저총, 쌍영총, 천왕지신총 등의 고분벽화에 삼족오가 보인다. 그래서 삼족오가 고구려 고유의 상징문양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는 드라마 ‘주몽’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일대기를 그린 것인데, 주몽의 무리가 삼족오의 깃발을 들고 다니거나 처소에 삼족오를 그려놓은 장면을 보며 전 국민이 삼족오를 고구려만의 상징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삼족오와 우리 민족은 관계가 없는가? 아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왜냐하면 삼족오는 고구려 훨씬 이전부터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태양신을 믿는 천손사상을 기본으로 천지인 삼재(三才)를 중시한 민족이다. 오늘날도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한글이 바로 ‘천지인’의 결합체가 아니던가.
중국 화상석의 삼족오
중국 화상석의 삼족오
고대 북방유목민족은 기후와 환경의 변화로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삶 자체가 이동의 연속이었다. 길을 통해 이동하고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먼저 정착해 살아가던 토착세력을 정복하거나 통합하며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중국, 한반도, 일본 등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한나라 때의 화상석에 삼족오가 나타나는 지역은 산동과 하남, 하북 등 중국의 동북부지역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초기 삼족오의 분포지역이 동북아시아라는 것을 증명한다. 동북아시아는 오래전부터 고조선을 필두로 우리 민족의 거주지였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삼족오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상징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그러니 우리 민족의 원류로부터 계속 사랑받던 삼족오가 고구려 때에 보다 일반화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가갑 위진벽화묘에 그려진 삼족오는 어떻게 전해졌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대외관계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372년,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준다. 전진은 중국의 왕조로 5호16국시대 초반에 동진(東晋)과 함께 중국을 양분한 국가다. 전성기를 이끈 왕은 부건(符健)인데 서쪽으로는 감숙성을 포함하여 서역의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요동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차지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다. 하지만 고구려와 전진은 동맹을 맺고 항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동맹관계는 서역의 지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던 고구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위진벽화묘의 삼족오, 길을 통한 문명교류의 흔적

국가 간의 동맹은 많은 교류를 수반한다. 교역과 함께 문화도 상호 교류되는데 전진은 고구려에게 불교를 전하고, 국운상승기인 고구려도 전진에게 삼족오를 전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지 10여 년이 지난 383년, 전진이 멸망하고 감숙 지역에는 5량이 난립한다. 전진의 왕 부견의 수하였던 여광이 후량(後凉)을 세웠는데 그 도읍이 주천이다. 후량 때 건설된 위진벽화묘에 삼족오가 나타나는 것은, 전진 때 전래된 삼족오가 감숙 지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왕조가 교체된 까닭이다.

4∼5세기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감숙성의 고분벽화에서 나타나는 동질성은 이와 같은 교류의 산물인 것이다. 벽화의 구상이 고구려의 덕흥리 고분벽화와 똑 닮았다. 그런데 동질성은 벽화만이 아니다. 무덤의 중앙에 위치하는 묘도와 전 후실의 종렬배치, 부장품 등이 고구려와 너무도 흡사하다. 중국 어디를 찾아봐도 이처럼 고구려와 비슷한 무덤 구조는 없다. 하지만 멸망과 난립의 연속이었던 5호16국시대가 저물고 수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한 뒤에는 삼족오가 자취를 감춘다. 수나라는 고구려와 적대 관계였기에 교류가 끊어지면서 삼족오도 더 이상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 머리에 볏이 있다.
고구려 벽화의 삼족오. 머리에 볏이 있다.
오늘날은 우리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비단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만은 아니다. 일제가 자행한 역사 왜곡으로 인한 왜곡된 역사의 파편들이 우리 민족을 오랫동안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국사를 사회과 과목의 일부분으로 평가절하하고 필수과목에서 제외하는 등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말로만 ‘허구’요 ‘역사왜곡’이라며 외칠 뿐, 정작 필요한 조치는 취하지 못하고 뒷짐만 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더해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 조상이었고 그 조상들이 세운 나라가 배달국, 단군조선 등의 고조선 시기를 거쳐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발해와 고려, 조선으로 면면히 이어져왔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중국 동북부 요하지역에서 발굴된 다량의 홍산문화 유적지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해주는 자료임에도 우리는 연구조차 꺼려한다. 그리하여 아직도 한 무제가 설치한 4군이 한반도의 북한지역이요, 고구려의 최대 영역이 지금의 요하를 넘지 못하였으며, 수도인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우기는 어처구니없는 아집 속에서 우리의 상고사는 멍들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깨달으려 하지 않으니 더 무엇하리요.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니라 ‘봉황’이어야

삼족오의 오(烏)가 까마귀라는 말도 재고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했다. 그러면 삼족오의 ‘오(烏)’는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오(烏)’는 오골계(烏骨鷄), 오죽(烏竹), 오석(烏石)처럼 예로부터 ‘검다’는 말로 쓰였다. 이렇게 볼 때 삼족오는 까마귀가 아니라 세 발 달린 ‘검은 새’를 말하며, ‘검다’는 것은 태양의 흑점을 상징한다. 그런데 까마귀가 아니라면 그 ‘새’는 어떤 새일까? 그 새는 봉황(鳳凰)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보이는 삼족오와 다르게 우리의 삼족오는 머리에 볏이 있다. 중국인들이 용의 자손이라 말하듯 우리는 봉황의 자손이다. 봉황은 동이족이 섬겨온 신조(神鳥)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국가의 문양이 봉황인 것은 이를 대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ᄇᆞᆰ’, ‘알’ 등의 문자도 태양과 새와 관련된 우리의 고유어다. 그러므로 삼족오는 태양 속에 사는 ‘세 발 달린 검은 봉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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