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4.03 14:51 | 수정 : 2014.04.03 22:26

"김일성 장군을 지지하라"는 소련 장성 발언에 군중들 야유

(7) 김일성에 대하여

그 생가가 있는 대동군

평양의 외곽을 두르고 있는 행정구역이 대동군(大同郡)이다. 그 서쪽에는 강서군(江西郡)이 있다. 같은 평양 권역에 있지만,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대동군은 전체적으로 볼 때 평양 시내에서 평균 12㎞ 정도 떨어져 있다. 강서는 그 거리가 28㎞에 이른다. 평양으로부터 가까이 있어서 대동군이 좀 더 대도시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들을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대동군은 강서에 비해 조금은 덜 개방적인 곳이었다.

강서에는 고구려 고분(古墳)이 많다. 고구려 도읍인 평양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곳에 무덤을 많이 써서 그랬다. 내가 어렸을 적 ‘서양 문물에 어느 정도 눈을 떴느냐’를 가늠할 때 ‘개화(開化)’라는 개념이 하나의 기준이었다. “이 지역이 어느 정도 개화했느냐”는 식의 말이 자주 등장했다. 그런 ‘개화’의 개념으로 따지자면 대동군은 강서군에 많이 뒤졌던 지역이다. 그 이유는 잘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대동군은 강서군에 비해 개화의 정도가 많이 떨어졌던 곳이다.

그 대동군에 속해 있던 만경대가 김일성의 생가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은 북한 왕조 정권에 의해 성역 중의 성역으로 떠받들어지는 곳이다. 북한이라는 왕조의 창업자가 바로 김일성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의 생가라고 알려진 만경대로부터 훨씬 서쪽에 있는 강서군 출신이다.

젊은 시절의 김일성.
젊은 시절의 김일성.
나는 그곳 강서에서 7살 때까지 살았다. 그러고서는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를 따라 3남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강서에 대한 기억은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평양에서 살 때 그곳 분위기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강서에는 일찌감치 기독교가 자리를 잡았다. 신자들이 꽤 많았고,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뜬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서 사람들은 도시에 적응하는 속도도 비교적 빨랐다.

반면 대동군 사람들은 좀 더 투박했다. 그 대동군의 만경대라는 곳에서 태어난 김일성의 생년은 1912년이다. 내가 1920년생이니 그가 나보다 8살이 많다.

나는 평양에서 줄곧 자랐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 사범학교에 진학한 뒤 군문(軍門)에 들어가고자 만주군관학교를 지망했다.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서 약 3년간 일한 뒤 1945년에는 해방을 맞이해 평양에 머물고 있었다.

김일성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원산항에 상륙한 뒤 소련군의 보호를 받으며 평양에 나타나면서 평양 시내 분위기가 변했다. 그는 새로운 실력자로 행세했다. 당시 남쪽은 미군이 장악했고, 38선 이북은 소련이 접수한 상태였다. 따라서 소련이 대리 집정자로 누구를 내세우느냐는 꽤 큰 관심거리였다.

공설운동장에서 비웃음을 사다

평양에서는 당시 김일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돌았다. 해방 뒤 2개월이 지난 10월 14일 무렵이었다. 소련 군정이 개최하는 김일성 환영 군중행사가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당시 북녘의 정국(政局)은 어디로 흐를지 몰랐다. 소련이 지지하는 김일성이라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서는 나도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평양공설운동장 군중행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평양공설운동장 군중행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꽤 소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그곳에 모였다. 시간은 몇 시였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밝은 대낮임에는 분명했다. 가운데에는 무대가 차려져 있었고, 연단에는 소련 군정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 있었다. 사회자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소련군 장성 하나가 무대에 서더니 통역을 통해 “여러분이 이제는 김일성 장군을 적극 지지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이어 나타난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예상보다는 아주 젊은 사람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군중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연단 아래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허탈하다는 듯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에이~뭐 저래” “야, 좀 이상하다”는 말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대개가 웃음기가 담긴 말들이었다.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당시 평양 사람들 사이에는 ‘독립투사 김일성’에 관한 이미지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 당시 평양 사람들이 생각하던 김일성 장군은 적어도 나이가 70은 넘었어야 했다. 그런 대중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아주 젊은 김일성이 무대에 등장하자 사람들이 일종의 야유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젊은 김일성의 등장은 심상찮은 신호의 하나였다. 당시 평양을 비롯한 38선 이북의 모든 지역은 소련군의 장악 하에 있었다. 소련군은 좀 특이한 군대다. 그들이 지닌 막강한 힘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미군으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독일과 일본을 차례차례 무릎 꿇렸던 군대였다.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
한반도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
그 뒤에서 무대 총감독을 맡아 전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이오지프 스탈린이었다. 그는 미국 중심의 서방진영에 맞서 치밀한 전략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냉전 구도의 한 축을 만들어가던 참이었다. 그런 스탈린 밑의 소련군은 욕심이 많은 군대였다.

소련군은 자신이 사용하는 많은 물자를 현지에서 최대한 조달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다. 이 방침에 따라 그들은 북한에 진주한 뒤에도 현지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들을 만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다. 기차의 여객들을 검문하면서 승객들의 시계를 빼앗아 팔뚝에 여러 개 걸고 다니면서 전리품(戰利品) 쯤으로 과시하던 행동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내용이다.

조만식 선생 사무실을 찾은 김일성

그런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밤에는 시내에서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이튿날 그 총소리의 연유를 캐물어 보면 반드시 소련군이 개입해 있었다. 그들이 민가에 들어가 물건을 빼앗는 과정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민심은 흉흉해졌다. 소련군에 의한 물건 강탈이 제법 이어지면서 평양의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서서히 움직였지만, 그에게 모이는 힘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제법 민감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내 외종사촌인 송호경 형은 당시 조그만 사업을 벌여 부유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정치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은 당시 평양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가장 확실한 지도자로 떠올랐던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1945년 광복 직후 만들어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고당 조만식 선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선생은 1932~1933년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직후 만들어진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고당 조만식 선생.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이 모습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다. 선생은 1932~1933년 조선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나는 해방정국에서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런 내 처지를 알았던 송호경 형은 내게 “함께 조만식 선생을 모시자”고 권유했고, 나는 그에 응해 선생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이 공설운동장에 나타나 새로운 지도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나는 매일 양복을 입고 산수(山手)소학교에 있던 평양시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출근했고, 아울러 조만식 선생이 거주하던 고려호텔에도 왕래해야 했다.

당시 김일성은 여기저기를 분주히 다니면서 자기 세력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조만식 선생의 비서실에 있으면서 그런 동향을 주의 깊게 살필 수 있었다. 공설운동장 무대 위에 그가 나타났을 때 나는 속으로 ‘생김새로 봐서는 한가락할 사람은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보였다. 속을 감추고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해방 뒤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이 처음부터 줄곧 강한 이념성을 보였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을 감추면서 민족주의 진영을 비롯해 자신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포섭하는 데 열심이었다. 누구든 만나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하고 다녔다. 평양에 잠시 들렀던 만주군 선배 정일권과 김백일 등도 그의 포섭 범위에 들어 있었다. 대부분은 그런 김일성의 권유에 귀가 솔깃하는 편이었다.

그런 김일성이 서서히 조만식 선생을 포섭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의 실체는 분명치 않았다. 소련을 등에 업어 공산주의를 내세우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으나, 정국을 이끌면서 자신과 이념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전혀 미지수였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있던 조만식 선생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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