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31 05:15

'나니아 연대기' 마녀役 스윈튼, MoMA서 하루 8시간 睡眠 연기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에선 棺에 든 80代 미망인 역할 몰입
작가주의 감독에게 靈感 주면서 無言의 카리스마로 관객 압도해

황희연 영화칼럼니스트 겸 여행작가 사진
황희연 영화칼럼니스트 겸 여행작가
오직 잠을 자기 위해 미술관을 부지런히 찾았던 여자가 있다. 우리에겐 '나니아 연대기'의 핏기 한 줌 없는 '하얀 마녀'로 널리 알려진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다. 2013년 한 해 동안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펼쳐진 이 이상한 퍼포먼스는 하얀 유리관 안에 누워 잠자는 여배우의 모습을 그냥 보여준다. 유리관 안에는 쿠션이 깔려 있고, 물도 한 병 놓여 있다. 틸다 스윈튼은 시간을 따로 정해두지 않고 가끔 MoMA를 찾아 8시간 동안 유리관 안에서 잠을 자거나 죽은 척 누워 있다가 돌아갔다.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은 여배우가 낯선 장소에서 수면을 취하는 모습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봤다. 영화로 치면 생략돼 절대 보이지 않는 시간, 일상적인 삶에서조차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던 시간이 예술의 이름으로 호명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양성 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틸다 스윈튼은 다시 한 번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누워 있다. 그녀가 자리를 펴고 누운 곳은 관 속이다. 유럽의 동쪽 끝에 있는 가상의 국가 주브로브카에 있는 한 호텔을 배경으로 마담 D 피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 영화에서 틸다 스윈튼은 살아 있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다페스트 호텔에 마지막 방문했을 때 구스타브(랄프 파인즈)가 손톱 색깔이 좋지 않다고 걱정하며 대화를 나눴던 것이 살아 있는 모습의 전부다. 나머지 시간에는 관 속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다. 영화는 마담 D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구스타브와 그의 조수가 누명을 벗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을 탐미적인 영상, 동화적인 색채로 흥미롭게 그려나간다.

원래 50대 초반인 틸다 스윈튼이 이 영화에서 맡은 역할은 80대 미망인이다. 덕분에 그녀는 끽해야 5분 남짓한 연기 분량을 위해 5시간이 넘는 분장 시간을 견뎌야 했다. 팔과 가슴, 목에 보형물을 넣고, 무거운 가발을 쓰고, 나이에 어울리는 치아를 끼고, 늘어진 귓불을 만들어 붙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마담 D의 외모에서 틸다 스윈튼 본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녀는 자기를 모두 지우고, 연기를 펼칠 무대조차 부여받지 못한 채 가만히 누워 있다. 그런데도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이상하게 마담 D가 풍기는 기묘한 카리스마다. 그녀는 조용히 누워 있지만, 절대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랄프 파인즈부터 에드워드 노튼까지, 한데 모으기 어려운 스타들을 불러 모아 어른스러운 동화를 만들어낸 웨스 앤더슨 감독은 산만하게 흘러가기 쉬운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그녀를 명확히 세워놓는다. 틸다 스윈튼은 감독에게 매번 그런 여배우였다. 8편의 영화를 함께 한 데릭 저먼이나 4편의 영화를 함께 한 루카 구아다그니노에게, 그녀는 영감의 원천을 끊임없이 제공해주는 뮤즈 같은 존재였다. 작가주의 감독과 주로 작업하지만 감독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고 작품 속에 자신의 인장을 명확히 눌러 박는다.

그녀의 출연작 중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아이 엠 러브'다. 부잣집 마나님으로 얌전하게 살아가던 한 여자가 산 중턱에 사는 요리사에게 푹 빠져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다. 집으로 달려온 그녀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변기에 앉아 연신 웃음을 쏟아낸다. 거울을 보면서 웃고, 입을 가리고 웃고,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를 만난 감독들의 얼굴에 항상 그런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았을까. 배우를 넘어, 온몸으로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한 여배우의 에너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황희연 | 영화칼럼니스트 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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