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29 05:30
서울 서대문구의 연세대 동문 길을 걷다 보면 주변 건물과 달리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마감된 건물을 볼 수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카페로 운영되고 있고, 외벽엔 궁서체로 ‘김옥길 기념관’(1999년 作)이라고 적혀 있다.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인 김동길(86) 박사가 건축가 김인철(67)에게 ‘찻집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작품이다.
김옥길 기념관 야경/박영채 사진작가
김옥길 기념관 야경/박영채 사진작가
김옥길 기념관이란 건물 명칭은 김동길 박사가 직접 지었다. 고 김옥길(1921~1990) 여사는 김 박사의 누나로 이화여대 전 총장이자 1979년부터 약 6개월여 문교부 장관을 지낸 한국 여성계의 거목이다.

연세대와 이화여대를 가르는 성산로 주변에서 1999년 준공된 이 건물은 젊은 대학생의 모임이나 예술인들의 문화행사가 자주 열리는 명소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콘크리트 박스 8개가 붙어 폐쇄된 건물처럼 보이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앞·뒷면이 트여 있는 박스가 점층적으로 커지면서 열려 있는 느낌이다.

트인 면은 유리로 마감돼 1~2층의 내부가 콘크리트에 의해 분절돼 보인다. 열림과 막힘,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무는 김인철의 건축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으로 1999년 건축가 협회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김옥길 기념관 내부/박영채 사진작가
김옥길 기념관 내부/박영채 사진작가
김인철은 1947년생으로 유걸(74), 조성룡(70), 류춘수(68), 승효상(62) 등 현재까지 손을 놓지 않은 건축 원로 중 한 명이다. 홍익대 건축학과, 국민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4년간 건축가 엄덕문 밑에서 실무를 거쳤다.

1986년 독립한 그는 현재까지 건축설계사무소 ‘아르키움’을 이끌고 있다. 현재까지 100여채가 넘는 건물을 설계했으며, 건축가 협회상, 서울시 건축상, 건축문화대상, 아시아태평양문화 건축디자인상, 김수근 문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쓴 한국 건축계의 큰 별이다.

김인철은 풍토(風土)에 기반을 둔 한국적인 건축의 속성을 찾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이어가고 있다. 벽을 통해 공간을 만드는 서양 건축과 달리 기둥으로 틀을 짜고 집터 내에서 자유롭게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trademark)’다.
디보이드(devoid) 전경/박영채 사진작가
디보이드(devoid) 전경/박영채 사진작가
김옥길 기념관과 마찬가지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devoid(디보이드)’ 건물은 일대에서 작지만 눈길을 끄는 건물이다. 디보이드는 사방이 막힌 회백색 콘크리트 건물로 간판은커녕 창문도 없다. 김인철의 2003년 설계작이다.

이 건물은 우선 외관이 압권이다. 묵직한 콘크리트 박스가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뿐 아니라 매끄럽게 뽑힌 노출 콘크리트 면은 10년 된 건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노출 콘크리트의 대가로 꼽히는 세계적인 거장 안도 다다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김인철은 “김옥길 기념관 작업을 마친 이후 바로 맡은 프로젝트로 노출 콘크리트 기법에 대한 10년간의 경험과 고민을 응축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디보이드(devoid) 내부 전경/박영채 사진작가
디보이드(devoid) 내부 전경/박영채 사진작가
내부로 들어가면 외관과는 전혀 딴판인 분위기다. 밝고, 깊은 느낌의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우후죽순 난립한 주변 건물과의 시각적 단절을 꾀하면서도 내부는 건축주인 그래픽 디자이너와 동류 작가가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지하에서부터 꼭대기 층까지 이어지는 빈 공간은 건물 곳곳에 공간들을 시각적으로 이어주는 기능을 한다. 꼭대기서 내려오는 빛은 사방이 막힌 건물 내부를 은은하게 밝힌다.
김인철 건축가
김인철 건축가
이 건물에 입주한 ‘윤디자인’의 황지원 연구원은 “건물 밖은 홍대 상권이 커지면서 매우 번잡한 분위기지만, 내부에 들어오면 사방을 둘러싼 콘크리트벽으로 묘한 안정감이 느껴진다”며 “사방은 막혀 있지만, 지붕이 뚫려 있기 때문에 어둡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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