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14 05:46

主體로서 삶 끝내는 '금지 내면화'는 최악 질병
'사회적 성찰' 獨보다 '저항 불능' 日이 더 암담해
금지 깨는 요란한 도전이 우리를 더 발전시킬 것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슬쩍 건들기만 해도 발끈하는 약한 부위가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나도 있다. '실력 없이 가벼운 심리학자'라는 평을 들을 때다. 매번 누가 그러더라고 전하며 내 속을 뒤집어놓는 인간이 꼭 있다. 하긴 내가 쓴 책 제목이 '노는 만큼 성공한다''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남자의 물건'같은 것이니 그런 평을 들어도 마땅하다. 그러나 십 수년간 음습한 독일에서 공부하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우울증까지 왔던 나다. 나도 '한 방'이 있다.

요즘 그 '한 방'을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아주 번잡하다. 방학만 되면 근대 인간 의식의 혁명적 변화에 관한 문화심리학적 설명을 위해 빈에서 뮌헨·바이마르를 거쳐 베를린까지 근대 지식 구성사의 루트를 구석구석 추적하고 다닌다. "이 '한 방'이면 다 죽는다"며 옹골차게 독일에 가지만, 정작 독일에 도착하면 형편없이 좌절하며 무너진다.

독일 사람들하고 싸우느라 그렇다. 갈 때마다, 독일의 원칙주의와 교묘한 인종차별과 투쟁하느라 내 모든 지적 에너지가 소진돼 버린다. 동행하는 사진작가 윤광준은 '나의 투쟁'이 시작될 때마다 슬그머니 사라진다. 내가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대고 있으면 산책하듯 다시 나타난다. 사람 좋게 웃으며 '도대체 왜 그리 싸우나?'한다. 젠장, 이러는 빡빡머리 윤광준이 더 밉다. 그 콧수염을 확 잡아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나인(nein·안 된다)'때문이다. 독일에는 도무지 곳곳에 견디기 힘든 '나인'투성이다. 이렇게 '금지(禁止)'가 당연한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물론 일본도 매우 심각한 '금지사회(禁止社會)'다. 일본에서는 '다메(だめ·안 된다)'라는 표현을 독일의 '나인'만큼이나 자주 듣는다. 가는 곳마다 '금지'투성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다메'에는 미안해하는 표정이라도 있다. 미안한 나머지, 당장에라도 바닥에 쓰러질 듯한 그들의 표정을 보면 '도대체 왜 안 되느냐?'고 물어보기조차 미안해진다.

독일의 '나인'은 질적으로 다르다. 너무나 당당하다. 거기에다 검지를 들어 올려 흔들기까지 하면, 난 바로 분노로 혼수상태가 된다. 내 독일 체류 십 수년간의 스트레스가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인'이라 말하는 것이 아주 큰 권력이라는 표정이다. 게다가 '독일에 오면 이 정도는 알고 지켜야지' 하는 계몽의 표현까지 덧붙이면 속이 바닥부터 뒤집힌다.

금지는 사람을 좌절케 한다. 모든 종류의 금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주체가 된 삶은 바로 끝난다. 처음 금지를 당하게 되면 사람은 일단 저항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심리학자 브렘(Brehm)은 '금지할수록 욕망한다'는 '심리적 저항 이론(psychological reactance theory)'을 주장한다.

두 그룹으로 나눠 음반 4장을 평가하는 실험을 했다. '그룹 1'의 참가자에게는 실험이 끝나면 참가 대가로 음반 한 장을 '스스로 골라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룹 2'의 참가자에게는 음반 한 장씩을 '나눠 준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음반을 평가하는 실험이 시작되자, 음반 4장 가운데 2장은 구할 수 없어 아무도 가져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 실험 결과 '그룹 1'의 사람들은 '가져갈 수 없는 음반'을 높이 평가했고, '그룹 2'의 사람들은 '가져갈 수 없는 음반'을 낮게 평가했다.

[김정운의 敢言異說, 아니면 말고] 禁止를 금지하라!
/김정운 그림
'그룹 2'의 사람들에게는 '신 포도 효과'라는 인지(認知) 부조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해석한다. 어차피 받을 수도 없는 음반이기에 음악적으로도 그다지 좋지 않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룹 1'이다. 스스로 골라서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음반들의 음악이 더 좋다고 평가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그토록 아름답고, 부모가 반대할수록 내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이 된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문화도 그렇다. '금지의 나라'일수록 하위문화가 강력하고 화끈하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의 '하드코어'가 그토록 강렬한 것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금지가 반복되고 지속될 때 생긴다. 처음에는 심리적으로 저항하고 분노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금지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외적 금지가 없어도 스스로 금지하고 체념하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금지를 내면화하고 체념하는 것처럼 무서운 질병은 없다.

모든 종류의 금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금지'에 대한 사회적 성찰을 멈추지 않는 독일은 그래도 건강한 나라다. 성숙한 사회란 온갖 종류의 '금지'에 대한 사회적 담론의 유무로 결정된다. 조용하고 안정되었다고 좋은 사회가 아니다. 일본이 안타까운 이유는 '금지'에 대한 어떤 저항도 불가능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베의 철없는 민족주의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 지식인 사회를 보면 더욱 가슴 아파진다.

먹고살 만해진 한국 사회가 경계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집단적 '학습된 무기력'이다. 절대 빈곤 시대, 분단 상황을 견뎌오며 너무나 많은 '금지'를 겪어왔다. 도대체 한국처럼 안 되는 것투성이의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었던가? 그래도 끊임없이 저항하고 소리지르며 부딪쳤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금지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야말로 한국의 문화심리학적 특징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순 '개뻥'이다.

아무튼 나는 끊임없이 금지에 시비를 거는 '시끄러운 한국'이 좋다. 금지를 허(許)하는 순간 주체가 된 삶은 바로 끝이기 때문이다.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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