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2.25 14:03
[미국 극동사령부 비밀문서 첫 공개]
‘과연 나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나 자신도 국적을 알 수 없다’
‘왕궁 등 한국내 재산 고국에 돌려주고 일본내 재산 처분하고 싶다’
‘재정 여건이 되면 미국 영주권 얻고 싶고 아들도 미국서 공부시키겠다’
미, ‘한국내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 일본내 재산은 한-일 양국 협의해야’
미, ‘한국 및 일본 국적법에 의해 영친왕은 일본 국적이 명백’
‘대조전, 인정전 등 궁궐과 전각은 내 재산’ 영친왕 재산목록도 눈길
영친왕 일본 저택은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별관, 참의원 의장공관 대여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던 영친왕 이은이 해방 직후 자신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한국이 아닌 미국으로의 이민의사를 미국측에 밝혔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영친왕 이은./조선일보DB
영친왕 이은./조선일보DB
이같은 사실은 맥아더 극동사령부의 외교부장이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정치고문인 윌리암 제이 세발드가 영친왕 이은의 요청으로 그를 만난뒤 황태자의 국적문제, 재산목록 및 처분문제, 미국이민을 포함한 장래계획 등 면담 내용을 정리해 1948년 10월 12일 국무부에 보고한 비밀전문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전 한국왕족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이 전문은 한마디로 나라 잃은 비운의 황태자의 인생역정이 객관적으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이 전문에 따르면 영친왕 이은은 극동사령부측에 국적법상 과연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의심스럽다며 유권해석을 의뢰했고, 한국과 일본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가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자신이 한국에서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지만 일본에 오래 살았고 일본인과 결혼했으며 일본 황족의 지위를 얻었으므로 과연 어느 나라 국적인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영친왕 이은은 1897년 고종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이복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 황태자에 책봉됐고 1926년 순종 사망 뒤 왕위를 계승, 제2대 이왕에 즉위했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황태자 책봉 직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 마사꼬(한국명 이방자)와 결혼했으며, 일본군 제51사단 사단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격랑의 시대를 헤쳐온 비운의 황태자였습니다. 사정이 이랬기에 해방을 맞이한 영친왕 이은은 과연 자신의 국적이 어디인지, 스스로도 깊은 회의에 빠졌던 것입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이 자신의 국적 및 재산, 장래 계획에 대해 설명한 부분.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이 자신의 국적 및 재산, 장래 계획에 대해 설명한 부분.
영친왕 이은은 또 자신의 재산, 즉 서울의 왕궁 등은 한국 정부에 모두 기증하고 일본내 재산은 생계를 위해 소유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즉 한국의 황실 재산은 모두 고국에 돌려주는 반면, 일본내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하고 싶은데 법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친왕 이은은 장래 계획에 대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며 자신의 이름을 한국에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어떠한 한국 정파의 계획에도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어서 영친왕 이왕은 충격적인 소망을 밝히게 됩니다. ‘재정적 여건이 허락한다면 미국에 장기간 체류하거나 영주권을 얻고 싶다. 지금 16세인 아들(1931년생인 차남 이구를 의미)도 미국에서 교육시켰으면 좋겠다’ 는 소망이었습니다. 일본내 재산을 모두 팔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미국 측에 통보한 것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10살때 일본으로 끌려간 뒤 타의에 의해 일본 황족으로 살아오다 마침내 조국 해방을 맞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어정쩡했기에 결국 미국 이민을 가려했던,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경계인 이은의 고민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영친왕 이은의 이같은 고민에 대해 맥아더의 정치고문 세발드는 같은 전문에 극동사령부의 견해를 담았습니다. 영친왕 면담때 극동사령부의 담당 참모를 배석하게 했고, 그들과의 논의와 영친왕 관련서류 및 법규 검토를 마친 뒤 그 내용까지 포함해서 국무부에 보고한 것입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세발드가 '영친왕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언급한 부분.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세발드가 '영친왕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언급한 부분.
세발드는 국적 문제와 관련, 영친왕 이은의 기구한 인생 역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일본 황실과의 혼인 등으로 미뤄 이은 왕자는 일본에 귀화한 것이므로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또 1948년 5월 11일 제정된 한국 국적법에 따르면 영친왕은 한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 않으며, 일본 황실로의 입적 등을 취소한다면 한국 국적을 회복할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현재는 일본 국적자임이 분명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 재산목록.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 재산목록.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의 재산목록을 재정리한 것.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에 포함된 영친왕의 재산목록을 재정리한 것.
세발드는 재산문제와 관련, 영친왕이 소유권을 주장한 한국과 일본의 부동산 목록을 상세히 기록하며, 한국내 영친왕의 재산은 한국정부의 소유이며 다만 일본에 있는 그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지가 이슈라고 전했습니다. 특히 이 전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4페이지 분량의 영친왕 재산목록입니다.

일본내 재산과 한국내 재산으로 나뉘어 기록된 이 재산목록에서 영친왕은 일본 아카사카내 저택과 토지 등 모두 6개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며 주소와 건평, 건립연도, 현시가(단위: 엔화)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한국내 재산으로는 창덕궁내 대조전 등 궁궐과 종묘, 토지 등 모두 17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재산목록에 기록된 영친왕의 재산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조전, 순정전, 인정전, 낙선재, 동명전, 명정전, 함영전 등의 궁궐내 전각과 종묘정전, 종묘, 사찰, 토지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또 소재지는 지금은 거의 잊혀진 지명이 돼 버린 와룡동, 훈정동 등으로 기록돼 있으며 경기도의 서울이라고 표기돼 있습니다.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의 재산 소유권에 대한 해석.
윌리암 J 세발드가 1948년 10월 12일 미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중 영친왕의 재산 소유권에 대한 해석.
세발드는 이슈가 된 영친왕의 일본내 재산에 대해 일본 동경 중심부에 위치해 일본정부나 대사관 등이 사용하기에 좋은 건물이며 1947년 10월 11일 극동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일본정부 관리하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1947년 12월 15일 일본 정부가 영친왕의 저택을 일본 참의원 의장 공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영친왕과 임대계약을 맺었으며, 월 임대료 10만엔을 영친왕에게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정부가 이같은 임대계약서를 극동사령부에 제출했고 극동사령부는 약 한달뒤인 1948년 1월 21일 이 계약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즉 승인 통보를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1929년 10월 신축돼 영친왕이 거주했던 일본 동경 아카사카의 4층 저택. 후에 프린스호텔 별관이 된다.
1929년 10월 신축돼 영친왕이 거주했던 일본 동경 아카사카의 4층 저택. 후에 프린스호텔 별관이 된다.
일본 참의원의장 공관으로 임대됐던 영친왕의 자택은 바로 일본 동경 아카사카에 있는 프린스호텔의 별관으로 영친왕은 이 집을 사실상 강요에 의해 임대명목으로 내준 뒤 같은 주소지의 조그마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고 전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문에 포함된 재산목록에 따르면 1929년 10월 바로 이 아카사카에 4층 주택 한채와 2층 주택 한채가 신축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영친왕은 1948년 당시 4층 저택은 내준 뒤 집사나 신하들을 위해 지었을 법한 2층 주택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발드는 또 한국 정부는 영친왕의 일본내 재산에 대해 (대한제국의) 황실이 이땅을 사고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돈을 지출했으므로 한국 국유재산으로 이해하고 있고 서울의 왕궁 등은 영친왕 이은의 이름이 아니라 이왕직 장관의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친왕 이은의 일본내 재산처분에 대해 현재 극동사령부는 아무런 입장이 없으며 한국정부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이 문제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문제는 한·일 양국 정부가 해결할 문제’라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해결할 문제이므로 극동사령부가 골치아픈 문제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발드는 이 전문에 한국국적법, 영친왕의 한국과 일본내 재산목록, 1947년 10월 11일의 극동사령부 명령, 1948년 1월 21일의 영친왕 자택 임대 관련 승인서류 등을 첨부했습니다.
미 국무부 한국대표부가 1948년 11월 6일 미 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미 국무부 한국대표부가 1948년 11월 6일 미 국무부로 타전한 ‘이은 왕자의 국적과 재산’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
세발드의 국무부 보고에 이어 미국무부 한국대표부도 약 한달뒤인 1948년11월 6일, 영친왕 관련사항에 대한 견해를 국무부에 보고하고 이를 극동사령부에도 전했습니다. 한국대표부는 이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이라고 전제하고 영친왕은 일본 국적 보유자이며 영친왕의 한국내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일본내 영친왕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한국과 일본정부간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정해질 것이며, 영친왕이 이들 부동산을 한국 정부에 주고 싶다면 한국정부는 사용료를 내겠다는 입장이라고 전했습니다.

또 이 전문에 동봉된 11월 5일자 보고서는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국대표부는 이은 왕자의 국적문제에 대해 1947년 9월 25일 미군정청내 법무실이 이미 검토했다며, 영친왕이 일본황제의 조카와 결혼했기 때문에 일본국적법 736조에 의거, 일본국적자로 간주되며 한국법상으로도 한국국적자는 아니라고 정리했습니다. 영친왕의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도 미군정청측은 영친왕 개인의 재산이 아닌 한국정부 소유라는 명쾌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조약 1호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조협정’이 담긴 1949년 1월 19일자 대한민국 관보.
대한민국 조약 1호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조협정’이 담긴 1949년 1월 19일자 대한민국 관보.
영친왕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의 한국내 재산은 모두 미군정청 소유이며, 1948년 9월 11일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가 미군정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넘겨받았으므로 영친왕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본내 재산은 한국정부 소유로 추정되지만 이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생각된다며 다시 검토해야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INITIAL FINANCIAL AND PROPERTY SETTLEMENT OF 1948)은 대한민국 조약 1호로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대표 이범석, 장택상과 미국 대표 존 무초 간에 체결됐습니다. 일주일뒤인 9월 18일 국회비준을 얻은 뒤 이듬해인 1949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공포됐고 다음날인 1월 19일자 관보에 4페이지 분량으로 게재됐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사용중인 서울 시내 주요 호텔등 12건의 부동산에 대해 ‘임시무상차용’을 허용하는 등 협상과정에서 숱은 갈등을 낳았던 이 협정의 제1조에는 '미국 정부는 좌기 재산에 대하여 미국이 보유하였던 일체의 권리, 명의와 이익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함’이라고 규정돼 있으며 이에 따라 영친왕의 재산은 한국 정부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한국대표부 역시 영친왕의 재산에 대해 한국법은 한국내 재산에 대해서만 결정할 수 있으며 일본내 재산소유권문제는 1948년 10월 12일 세발드가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서 제안한 대로 한국과 일본정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토록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일본내 재산에 대한 결정은 유보하고 한·일 양국에 이를 맡기자고 건의한 것입니다.

이 전문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영친왕 이은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가능하다면 일본내 재산을 처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했습니다. 그가 미국 유학을 시키려던 차남 이구는 미국으로 건너가 MIT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영친왕은 아들 졸업식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정치권의 반대 등으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 이민까지 고려했던 영친왕 이은은 5·16 혁명뒤인 1962년 12월에야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해방 18년만인 1963년 11월 박정희 전대통령의 주선으로 늦게나마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귀국, 고국에서 7년여를 살다 1970년 5월 1일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또 그의 아들 이구씨는 MIT졸업뒤 미국내 최고의 건축설계회사인 아이엠 페이에서 건축사로 일했습니다. 아이엠페이는 1993년 김영삼 정부때 미국물리학회의 건물을 사들여 신축한 뉴욕의 현 한국유엔대표부 건물을 설계한 회사입니다. 마지막 황세손으로 불리는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는 2005년 일본 아카스카 프린스호텔 별관, 즉 영친왕의 일본 자택이었다가 참의원 의장공관으로 사용됐으며 마침내 호텔로 변해버린 그 ‘한많은 저택’에 투숙했다 운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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