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2.21 05:45

視線은 곧 마음… 인간만이 타인 시선 느끼며 疏通
新生兒 본능적으로 엄마와 '눈'으로 소통 능력 익혀
부족한 이들 보듬고 배려하는 건 인간 존재론 핵심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사진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살면서 가장 억울한 일은 시선(視線)을 의심받았을 때다. 아무 생각 없이 넋 놓고 시선을 돌리다가 어느 처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마치 자신이 예뻐서 쳐다보는 줄 알고 반응하면 세상에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예쁜 여자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특유의 교만한 태도가 있다. 그러나 하나도 안 예쁜데, 자기가 예쁜 줄 알고 교만한 표정을 지으면 아주 환장한다. 막 쫓아가서 당신은 정말 해당 사항 없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고 우스울 때 너무 억울한 거다. 어떤 이가 방귀를 뀌고 내린 엘리베이터를 막 탔는데, 나를 따라 타는 사람이 코를 막으며 의심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볼 때보다 더 억울하다.

시선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시선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그래서 '시선을 느낀다'고 하는 거다. 서로 '마주 보기(eye-contact)'와 어떤 대상을 '함께 보기(joint-attention)'는 인간만의 위대한 능력이다. 특히 '함께 보기'에 관한 연구 결과는 지난 수십년의 심리학적 성과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은 타인의 마음에 관한 이론을 세운다고 한다. 즉 '마음이론(theory of mind)'을 먼저 세우고, 그 이론을 검증하는 것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주장이다. 이 고등 인지 능력 추적 과정에서 발달심리학자들은 '함께 보기'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인가를 밝혀냈다.

'함께 보기'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함께 보는 것이다. 어떤 대상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대상을 함께 봐야 한다. 시선을 먼저 공유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침팬지를 비롯한 유인원이 인간을 뛰어넘는 놀라운 인지 능력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여전히 동물인 까닭은 바로 이 '함께 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만 타인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 아, 수만년간 인간과 함께 살아온 '개'도 가능하다. 그래서 개를 잡아먹으면 절대 안 되는 거다.

김정운 그림
김정운 그림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해당 단어의 의미를 공유해야 한다. 의미 공유의 주체가 생략된 객관적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문학에서는 언젠가부터 '객관성(objectivity)'이라는 단어를 기피한다. 아인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 이후로 자연과학에서도 '객관성'이란 표현을 아주 촌스러워한다. 대신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고 이야기해야 폼이 난다. '상호주관성'이란 주체들 간의 의미 공유를 철학적으로 개념화한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이 위대한 의미 공유 능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아기가 처음부터 의미 공유라는 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함께 보기'가 가능하다. 생후 9개월 정도 되면 아기와 엄마는 서로 시선을 공유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동시에 '이거 뭐야?'라는 아기의 언어적·비언어적 신호와 엄마의 현란한 대답으로 아이의 일상은 꽉 채워진다. '이건 기차야!' '이건 의자야!'라는 엄마의 대답을 통해 아기는 언어의 의미를 익히며 타인과 의미를 공유하기 시작하게 된다. '함께 보기'가 없으면 의미 공유는 절대 불가능하다.

발달심리학적 관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함께 보기'라는 이 위대한 능력은 왜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인가? 그 전 단계에서 '마주 보기(eye-contact)'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정서 공유(共有)'를 한다. 가장 신뢰 깊은 정서 공유의 소통 행위인 '마주 보기'는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동물은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으르렁거린다.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뭘 봐?'하는 표정이 돼버리는 한국 사내들도 인간적 의사소통의 기준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상호주관성'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발달심리학적으로 쫓아가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의미 공유'는 '함께 보기'라는 시선 공유가 있기에 가능하고, 시선 공유는 '마주 보기'라는 정서 공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다. (아, 죄송하다. '상호주관성'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신기해서 그렇다. 이렇게 쓰면 꼭 죽어라 달려드는 이들이 있다. 제발 그러지들 마시라.)

'마주 보기'는 왜 인간에게만 가능한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포유류는 어미의 배 속에서 '완숙(完熟)'되어 태어난다. 일단 태어나면 몇 시간 이내에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선다. 인간만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난다. 제 몸 하나 가누려고 해도 수개월이 걸린다. 그러나 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기간에 아기는 타인과 눈을 마주치고, 정서를 공유하는 능력을 배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있는 여타 포유류는 다른 존재와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아기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누워 꼼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위대한 까닭은 미숙아로 태어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든 미숙한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 미숙함이야말로 소통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측은지심과 의사소통은 동전의 양면이다.

좀 부족해 보이는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정언적 윤리학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론의 핵심이다. 미숙한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사회가 되고, 결국은 야만으로 전락하게 된다. 소통 부재의 원인을 매번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하며 흥분할 일은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정운 | 문화심리학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