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2.12 17:49 | 수정 : 2014.02.13 15:21

항일전쟁과 내전을 거친 중공군은 '당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6) 중공군은 강했다

중국 군대의 면모

우리는 그들을 때로 ‘당나라 군대’라고 부른다. 기율도 없고 기백도 없으며, 그래서 적이 나타나면 오합지졸(烏合之卒)로 뿔뿔이 흩어져 내빼는 그런 군대 말이다. 아울러 책임감도 없어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를 항상 잊는다. 그러니 적에 맞서 싸울 역량은 물론이고, 그럴 마음조차 내지 못하는 군대다. 중국인의 군대 얘기다. 그러나 그런 ‘당나라 군대’가 정말 중국의 군대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60여 년 전에 맞아서 싸웠던 중국의 군대는 절대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의 때를 가려 나설 줄 알았고, 또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물러설 줄도 알았다. 약한 상대를 고를 줄 알았으며, 강한 상대를 피할 줄 알았다. 전략의 운용은 매우 신중했으며, 아울러 용의주도했다. 그 전략을 펼치는 전술 또한 강하고 매섭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적을 면밀히 살피다가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때릴 줄 알았다. 화력이 강한 미군에게는 은폐와 엄호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으며, 전투력이 허약한 국군에게는 마치 사나운 맹수가 온 힘을 기울여 달려들 듯이 덮쳤다.
6.25 참전을 위해 1950년 10월 경 압록강 도하를 기다리고 있는 중공군 모습.
6.25 참전을 위해 1950년 10월 경 압록강 도하를 기다리고 있는 중공군 모습.
나는 만주국의 군관으로 있을 때 중국, 즉 우리로서는 늘 ‘대륙’이라고 부르던 그 곳의 군대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들은 우선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면밀하게 그 틈을 헤집던 일본 군대에 매우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아마 ‘당나라 군대’라는 인식 쯤으로 대륙의 군사적 수준을 폄하하는 버릇은 당시의 일본 군대로부터 비롯했을지 모른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중국 대륙을 삼키려는 제국주의 일본의 야욕이 처음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일본은 우선 류타오후(柳條湖)라는 곳에서 철도를 폭파해 이를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몰아간 뒤 당시 펑톈(奉天)이라고 부르던 지금의 선양(瀋陽)에서 군사 행동에 들어갔다.

당시 그 일대 중국의 군대는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라는 군벌(軍閥)의 병력이었는데, 상당한 세를 구축해 중국 전역의 군벌 중에서 손에 꼽을 만한 실력을 갖췄던 부대였다. 그럼에도 이들은 1개 대대에 불과한 일본의 병력에게 아주 무참할 정도로 깨지고 말았다.

그 과정은 이렇다.
당시 만주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는 관동군(關東軍)이었다. 일본이 아직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야욕을 펼치기 전이었다. 관동군은 일본이 그곳 일대에 건설한 만주철도(滿鐵)의 간선을 지키기 위한 철도 호위 병력이 전부였다. 만주 전체에는 8개 대대 병력이 주둔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만주사변 속 군벌의 군대

군벌 장쭤린은 1928년 일본이 꾸민 ‘황구툰(皇姑屯) 열차 폭파 사건’으로 살해됐다. 관동군은 그 여세를 몰아 만주를 본격적으로 집어삼킬 준비에 들어갔다. 관동군에서는 여러 사람이 그런 계획에 간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작전 참모였던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좌였다. 당시 일본군에서는 전략통으로 이름이 알려졌던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만주 자체를 일본군의 수중에 두려 했다.
작전 회의중인 중공군.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초반 공세를 밀어 붙였다.
작전 회의중인 중공군. 치밀한 전략과 전술로 초반 공세를 밀어 붙였다.
일본군은 류탸오후 인근의 철도를 폭파한 뒤 이를 빌미로 중국 군대를 공격했다. 야밤을 틈 타 1개 대대 병력이 당시 장쭤린 군벌 병력 1만5000명이 주둔 중이던 북대영(北大營)과 동대영(東大營)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일본군 1개 대대 병력과 장쭤린 군벌 중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났던 펑톈의 북대영 및 동대영의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벌인 이 싸움에서 중국 군대는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 약 800명 정도의 부대였다. 게다가 중무장한 병력이 아니었다. 철도 수비대의 성격이었으니 경무장 정도의 부대였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1만5000명의 중국 부대는 일거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당시 장쭤린 군벌의 군대에는 일본 고문관이 있었다. 그는 유심히 중국 부대의 동향을 살폈다. 중국 군대에는 아주 커다란 결점이 있었다. 장병들이 주말에 부대 밖으로 외출할 때 무기를 들고 나가 판매해 돈을 번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방지하고자 군 지휘부는 주말마다 장병들로부터 무기를 모두 회수해 창고에 넣은 뒤 이를 이중 삼중으로 닫아걸었다. 장병들이 제 무기를 팔아먹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책(苦肉策)이었다.
중공군은 미군의 공습에 대비, 장병들에게 식량자루를 나눠준 뒤 각자 출발해 목표지점에 집결토록 했다. 식량자루엔 쌀, 미숫가루 등이 들어 있었다.
중공군은 미군의 공습에 대비, 장병들에게 식량자루를 나눠준 뒤 각자 출발해 목표지점에 집결토록 했다. 식량자루엔 쌀, 미숫가루 등이 들어 있었다.
일본 고문관은 이런 상황을 일본 지휘부에 보고했다. 전략, 나아가 술수에 능했다는 이시하라 간지 등 관동군 지휘부는 이를 십분 활용했다. 무기가 없는 중국 병력 1만5000명은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했고,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은 경무장이라고 해도 나름대로 충분한 살상력(殺傷力)을 지니고 있었다.

무기를 창고에 이중 삼중으로 가둔 채 빈 손으로 적을 맞았던 중국 군대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일본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심각한 부패와 횡령 현상은 중국 군대의 또다른 특징이었다.

린뱌오 대신 나선 펑더화이라는 인물

그로부터 약 20년 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은 뭐가 달라졌을까. 문화적 동질성이 만주사변을 맞았던 장쭤린 휘하의 병력과 한국 전선에 나선 중공군이 다를 리 없다. 그들은 모두 같은 문화적 기질을 가진 같은 중국인이었고,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군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쭤린 부대는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지방 군벌의 병력이었고, 중공군은 중국 대륙을 석권한 뒤 강력한 명령체계를 가동하고 있던 공산당 휘하의 부대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1951년의 중공군은 일본이 벌인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에 맞서 오랫동안 항일(抗日) 전쟁을 펼쳤고, 이어 벌어진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풍부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군대였다. 한국 전선에 뛰어든 중공군이 공산당 군대 출신의 병력 뿐 아니라, 그에 쫓겨 대만으로 패주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 출신 병력까지 아우르고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 군대에서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핑싱관(平型關)이라는 곳에서 일본군 수송 병력을 크게 꺾었던 경력의 린뱌오(林彪)는 한국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중공군 내에서 가장 탁월한 지휘관이었다. 린뱌오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고 알려져 있다. 전쟁을 잘 이해했던 만큼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의 싸움이 두려웠을지 모른다.
북한 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
북한 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펑더화이.
그의 대안으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택한 인물이 펑더화이(彭德懷)였다. 그는 중국 해방군의 10대 원수(元帥) 중 한 사람이다. 군에서의 명망이 높기는 마찬가지지만, 전력(戰歷)의 화려함과 다양함 등에서는 린뱌오에 못 미치는 인물이다. 그러나 펑더화이 역시 일본군과의 치열한 싸움을 거친 몇 안 되는 중공군 장수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국민당과의 싸움에서는 대단한 전과를 올렸던 장군이다.

1898년에 출생한 펑더화이는 빈농(貧農) 집안 출신이다. 따라서 어렸을 적의 배움이라는 게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절의 사람답게 호(號)를 가졌다. 그 호가 ‘석천(石穿)’이다.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펑더화이가 취한 그 호의 뜻을 짐작할 것이다. 물방울이라도 계속 떨어지면 바위를 뚫는다는 의미다. 한자로는 ‘水滴石穿(수적석천)’이라고 적는다.

펑더화이는 물방물이 끊임없이 바위에 떨어지듯 싸움의 의지가 한결 같은 사람이었다. 꾸준하고 집요했다. 그는 전장을 잘 알았고, 야전 장병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신망도 높았고, 휘하 장병들의 신뢰도 높았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